쉬운 우리말 쓰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이강은 기자
- 등록일: 2025.01.03
- 조회수: 81
쉬운 우리말 쓰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이강은 기자
세계일보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이강은
평소 기사를 쓸 때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사실 관계가 맞는지, 뜻이 적절하고 어렵지 않은 단어를 쓴 건지, 띄어쓰기는 이상 없는지, 글이 매끄럽고 쉽게 읽히는지 따지면서 쓰기 때문이다. 이런 버릇이 든 데는 25년 전 수습기자 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사회부장의 한마디가 컸다. ‘중학교 2학년이 신문을 봐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사를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떤 독자든 어려움 없이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쓰라는 조언이었다. 그리하려고 항상 온라인 국어사전과 검색창 도움을 받아가며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어문화원연합회가 진행하는 ‘매체와 함께하는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에 참여한 지난해부터 기사 작성 시간이 더 길어졌다. 이 사업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언론 등 공공(성) 기관이 사용하는 ‘공공언어’를 쉬운 우리말로 쓰도록 하자는 게 취지다. 공공 정보를 파악하는 게 어려워 소외되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물 같은 우리말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생명력을 지니도록 찾아 쓰자’는 의미를 담아 ‘우리말 화수분’(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 연재를 하면서 기사 작성에 더욱 신중해졌다. 그동안 독자 누구나 무슨 내용인지, 기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등 기사 내용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써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부족한 점을 적잖이 느꼈다.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거라 자연스레 썼던 외국어도 가급적 쉬운 우리말 표현을 찾아 대체하고 있다. 외국어를 적당한 우리말 표현으로 바꿔주는 ‘쉬운 우리말 사전’이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불필요한 외래어와 청소년이나 젊은 세대에게 낯선 한자어 사용도 지양하고 있다. 지금 맡고 있는 공연 예술 분야의 경우 연극·클래식·국악·발레·뮤지컬·무용 등 장르별로 애호가들만 아는 용어가 많은데 일반인도 쉽게 이해하고 예술 쪽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풀어서 소개하는 편이다.
국어는 한민족 제일의 문화유산이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밀려드는 외국어와 국적 불명의 신조어, 줄임말 등에 치이고 있다. 특히 국민 누구나 정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쉬운 우리말을 써야 할 정부와 지자체, 공공기관 등에서 사용하는 ‘공공언어’의 그늘도 짙다. 예컨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내년 광복 80주년과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재일동포 문화예술인 주제 근현대사콜로키움을 개최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최근 냈다. 콜로키움 대신 토론회나 대담이라고 하면 될 걸 아는 사람만 아는 콜로키움이란 외국어를 썼다.
다른 공공기관의 정책 홍보·행사 관련 보도자료나 안내문 등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협력이나 협업을 ‘컬래버레이션(컬래버, 콜라보)’으로, 사회자나 진행자를 ‘모더레이터’라고 하는 식이다. 이처럼 공공기관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정책 홍보를 어려운 말로 하면 정책 인지도와 호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생명과 안전, 권리 보호 등에 관한 중요한 사안은 누구나 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공공언어를 전달하는 각종 언론매체가 자료에 있는 불친절한 표현을 그대로 옮기거나, 소수만 아는 외국어나 전문용어를 언급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지 소개하지 않은 기사를 내는 것도 문제다. 심지어 기자가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쓴 건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아리송한 기사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공공언어를 기록하고 알리는 책무를 부여받은 기자와 매체라면 최소화해야 할 문제들이다. 그런 면에서 언론은 물론 공공기관 안팎에 미치는 효과가 적지 않았으나 예산이 삭감돼 폐지된 ‘매체와 함께하는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을 복원했으면 한다. “공공언어를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꿔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공적 가치를 높일 경우 연간 3375억원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다”(현대경제연구원)는 연구 결과도 있잖은가.
공공언어를 중심으로 우리말을 쉽고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2005년 시행된 국어기본법과 국어 정책 등 틀 자체는 괜찮은 것 같다. 다만, 그런 제도와 정책이 공공기관 등 사회 전반에 제대로 자리잡도록 하기 위한 여건이 미흡한 실정이다. 문체부 지정 사단법인으로 지역민의 올바른 국어문화 생활을 돕고, 지자체와 주민들이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도록 교육·상담·연구·정책과제 시행 등 활동을 하는 국어문화원만 해도 그렇다. 전국 광역시·도에 20여군데 있는 국어문화원 한 곳당 연간 운영 예산이 2000만∼2500만원에 불과하다. 석·박사급 상근 연구원 한 명의 인건비도 감당할 수 없어서 외부 에서 맡긴 연구 사업을 많이 따내야 하는 등 운영 예산 확보 압박감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세대별 문해력 차이에 따른 소통 단절도 심각해지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쓰는 말을 노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사흘’이나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제대로 모르는 청소년이 적지 않다. 가뜩이나 세대 갈등이 심상찮은데 언어 소통까지 삐걱거려 ‘불통 사회’가 될까 걱정이다. 국어의 지위가 더이상 위태로워지지 않도록 하고 쉬운 우리말과 글 쓰기를 활성화하는 다양한 방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
이강은
- 세계일보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이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