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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로공사, 일본어와 외국어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다.

  • 등록일: 202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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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로공사, 일본어와 외국어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다.

곽현준 / 한국도로공사 건설계획팀장

곽현준 한국도로공사 건설계획팀장
곽현준 / 한국도로공사 건설계획팀장1992년 한국도로공사 입사 후 구조물처, 기획조정실, 지역본부 및 건설사업단 등을 거쳐 지금은 건설처 건설계획팀장으로 고속도로 건설사업 총괄 업무를 맡고 있다.

누군가에게 처음 경험은 두 번째 경험과는 사뭇 다르고, 유난히도 깊은 기억의 굴곡을 만든다. 나에게도 건설 현장의 첫날은 유독 뇌리에 깊이 남아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현장에서 나눈 대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장에서 처음 들은 일본어는 ‘아시바’였다. 순간, ‘시바’라고 들은 혈기 왕성한 그때의 나는 이를 욕설로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반격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시마이, 노가다’ 같은 진작 들어본 말은 기본이요, ‘사시낑, 반생’ 같은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일본어 낱말들의 향연을 맞닥뜨려야 했다. 한마디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러한 이질감도 잠시, 기이하게도 만 1년이 지나지 않아 나는 원래의 우리말이 오히려 생각나지 않았다.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 건설 현장은 대한민국의 독립 이후 70년이 넘은 현재에도 건설 국어가 제대로 독립하지 못한 채로 있다. 아니, 오히려 일본어 용어를 쓰지 않으면, 현장을 잘 모르는 샌님으로 여기거나 비하하는 일이 있을 정도이다.

여기에 언제부터인가는 영어와 한자어까지 범벅이 되어, 건설 현장이 국제시장을 방불할 만큼 다양한 국적의 언어들이 판치고 있다. 얼마 전 개통한 영화 제목 ‘싱크홀’같이 영어 단어 뜻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언어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블로업’, ‘포트홀’, ‘블랙아이스’, ‘램프’ 같은 영어와 ‘나대지’, ‘벌개제근’ 같은 한자어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누구나 문제를 제기하지만, 누구도 오래된 관행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은 하지 못한 채로 건설 현장은 그렇게 70년을 일본어 잔재와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흐름을 바꿔보고자 시도한 게 한국도로공사의 우리말 순화 정책이었다.

건설 현장의 올바른 우리말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2020년 한국도로협회, 대한토목학회, 한글문화연대 등 고속도로 및 국어 분야 전문가 그룹을 구성하고 그동안 발간된 국어 순화 자료집과 고속도로 설계도서, 도로 분야의 최근 3년간 보도자료 등에서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어려운 건설공사 관련 순화 대상 용어를 찾기 시작하였다. 또한 대국민 사전홍보와 소통강화를 위해 2020년 7월 ’전문용어 순화집 이름 짓기’ 공모전을 개최하여 이름 짓기에 2,067건, 외래용어 개선의견 70건의 참여를 끌어냈다. 총 13,800개의 건설 현장 외래용어를 검토하였으며, 건설 현장 순화용어의 공신력 확보 및 전문성 강화를 위해 국립국어원의 최종 감수를 거쳐 240개의 단어로 구성된 책자 “우리길 우리말”을 발간하였다.

한국도로공사는 위와 같은 고속도로 건설용어의 우리말 순화에 이바지한 노력을 인정받아 2020년 12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에 이어 올해 4월30일 공공기관 중 유일하게 정책소통 유공분야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였다.

그림1. 국무총리 단체 표창(정책소통 유공분야)을 받다그림1. 국무총리 단체 표창(정책소통 유공분야)을 받다


그림2. 국무 총리 표창 시상식에서 문화체육관광부 황희 장관(왼쪽)과 함께그림2. 국무 총리 표창 시상식에서 문화체육관광부 황희 장관(왼쪽)과 함께


그러나, 이 정도 노력으로 오랜 시간 굳어온 건설 현장의 일본어 사용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그러한 의구심이 드는 올해 봄, 국토교통부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대변인실에서 우리 공사의 우리말 순화 노력을 우수하게 보고, 전문용어 표준화 고시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전문용어 표준화 고시’는 국어기본법에 따라 전문용어를 국민이 알기 쉬운 우리말로 순화하여 고시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도로 분야의 전문용어 고시가 된다면, 관련 기준 개정이나 교과서 등에 순화된 용어가 실릴 수 있으니, 우리말 표현의 도로용어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후, 제도는 현재까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 7월에는 국토교통부 주관으로 도로 관련 공무원, 도로 전문가, 언어 전문가 15명이 한자리에 모여 문화체육관광부에 보낼 도로 분야의 전문화 표준안을 심의 의결하였다. 도로 전문가로는 도로학회, 대한토목학회 등에서 참석하고, 국어 전문가로는 영남대학교 이미향 교수님, 한글학회 리의도 이사님,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님과 국립국어원에서도 참여해주셔서 우리가 추진하는 ‘도로 분야 전문용어’의 전문성과 공신력을 더욱더 공고히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단어에는 도로 전문가의 반대의견도 있었다. 이미 오랫동안 굳어져 사용해서 용어가 바뀌면 오히려 현장이나 시장에 혼란을 줄 수 있어 당장 바꾸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순간 ‘초등학교’와 ‘오른쪽 통행하기’와 같은 오래된 일본문화 혹은 언어를 바꾼 사람들이 누군지 궁금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결국 우리 고유의 것으로 환원시켰으니 말이다. 협의회에서는 일부 단어는 다음에 개정할 때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협의회를 마무리하였다.

다듬은 전문용어는 국립국어원의 검토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심의가 끝나면, 국토교통부의 고시로 행정절차는 마무리하게 된다. 행정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적절한 홍보와 후속 조치가 필수적이다. 한국도로공사와 국토교통부는 다가오는 575돌 한글날을 맞아 널리 홍보하기로 했다. 코로나 상황에도 비대면으로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쉬운 영상 홍보물 제작, 도로 전문가의 인식 개선을 위한 학회 기고, 토목 박람회(Civil Expo) 참여,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교육 자료 배포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그 밖에 건설 현장 근로자들이 바뀐 우리말에 적응할 수 있게 건설 현장 근로자의 출퇴근 앱 알리미를 활용하고, 도로 관련기관에 알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또한, 의견 받는 절차를 마련하여 정기적으로 전문용어를 개정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가 계획한 노력을 마무리할 때, ‘그래도 좋은 시도였다’라고 평가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단 하나의 우리말이라도’ 건설 현장과 우리의 삶에 제대로 자리잡힐 수 있는 제대로 된 물결이 시작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