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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건범
- 등록일 : 20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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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새롭게 힘받아 뜨는 말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다듬을 외국어 새말 후보를 훑어보던 새말모임 위원들 중 몇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디제라티(digerati)? 이게 무슨 뜻이지? 풀이를 보니 디지털(digital)과 지식인을 뜻하는 ‘리터라티’(literati)를 붙인 합성어다. 정보화 시대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지식 계층을 뜻한다고 한다. 다시 한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평소 우리말 순화에 관심을 두고 불필요한 외국어 표현이 새로 등장하는 현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새말모임 위원들에게조차 낯선 단어가 아닌가. 그렇다면 일반 국민에게는 더더구나 낯설 법한 단어를 서둘러 다듬어야만 할까? 위원들은 잠시 고민을 했다. 결론은 이러했다. 이미 많이 쓰고 있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작업은 물론 시급하지만, 아직은 낯선 단어를 한 발짝 빨리 새말로 바꾸는 작업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외국어 신조어가 우리 사회에 안착하기 전에 우리말이 먼저 단단히 자리를 다져 놓으면 외국어가 불필요하게 끼어들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디제라티’는 특히나 쓰임새가 더 넓어지리라 예측되는 단어다. 지금은 주로 사회학이나 언론정보학 등 학술 분야에서만 주로 쓰이고 있지만, 정보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는 현대 사회에서 머지않아 대중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선제적으로 순화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가닥을 잡으니 말을 다듬는 작업은 빠르고 수월하게 진행됐다. 조어 자체가 ‘디지털’과 ‘지식인’이라는 두 개의 분명한 개념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은 이미 우리말로 순화하기 어려울 만큼 우리 사회에 정착해 버린 단어. 무리하게 우리말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살리기로 하고 ‘리터라티’라는 단어에 과녁을 겨누어 다듬기에 들어갔다. 이 역시 지식인, 지식층, 지식 계급 등의 단어로 쉽게 의견이 모였다. 후보 단어는 ‘디지털 지식인’, ‘디지털 지식층’, ‘디지털 지식 계급’으로 정해졌다. ‘사이버 지식인’, ‘디지털 정보층’ 등도 물망에 올랐으나 원 단어가 가진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탈락했다. ‘디지털 지식인’과 ‘디지털 지식층’은 둘 다 무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말이다. 새말모임 위원들은 그중 ‘디지털 지식층’을 일순위 후보로 꼽았다. ‘시대를 선도하거나 사회에서 지식 권력을 구사하는 집단’이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계층’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가 적절하다는 판단에서다. ‘디지털 지식인’이 그 뒤를 이었고 ‘디지털 지식 계급’을 마지막 순위로 후보 명단에 올렸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디지털 지식인’이 선택을 받았다. 응답자의 79.1%가 적절한 표현이라는 데 동의했다. ‘디지털 지식층’(76.9%) 역시 근소한 차이로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계급’이라는 표현은 다소 딱딱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과연 시민들의 선호도도 다른 두 후보 단어에 비해 뚝 떨어졌다(41.6%). 이렇게 해서 ‘디지털 지식인’이라는 우리 다듬은 말이 탄생하게 됐다. 여담 한 가지. ‘디제라티’라는 단어는 과연 ‘신조어’일까? 아직 우리에게 낯선 단어라고는 했지만, 이 말이 처음 세상에 등장한 것은 1992년 뉴욕타임스를 통해서였다. 무려 40년이나 된 단어로, 미국에서는 이미 웹스터사전에 등재될 만큼 ‘보통명사’가 됐다고 한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때 역시 1999년도다. 존 브록먼의 저서 ‘디제라티-디지털 시대의 파워엘리트’가 번역 출간됐다. 한창 ‘닷컴’ 바람이 시대를 풍미할 때 등장했던 이 단어는 이후 사용이 뜸해져 어느샌가 우리에게 ‘낯선’ 표현이 돼 버린 것이다. 하지만 언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잊혔다가도 부활하는 법.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이 그랬다. ‘현실 세계와도 같은 각종 사회 활동이 3차원의 가상세계에서 이뤄지는 것’을 일컫는 이 말은 신조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당히 ‘연륜 있는’ 단어다. ‘메타버스’라는 말이 세상에 처음 나타난 때도 ‘디제라티’처럼 1992년으로, 미국의 작가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에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전에 탄생했다 한동안 잊혔던 표현이 오늘날 정보통신의 발달에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활동까지 더해져 새롭게 ‘뜬’ 것이다. 디제라티도 메타버스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시대를 제대로 만나면 새로 생명을 얻고 활개를 치는 단어’가 될지 모른다. 아니, 앞서 말했듯 그럴 가능성이 크다. 메타버스는 2021년 국립국어원이 ‘확장 가상 세계’, ‘가상 융합 세계’로 다듬어 소개한 바 있다. ‘확장 가상 세계’, ‘가상 융합 세계’의 건투를 빌며, 새로 탄생한 ‘디지털 지식인’도 굳세게 뿌리를 내려 가길 기원한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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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제로? 탄소 중립? 윤순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 “넷째로, 넷째로 자꾸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계속 ‘네 번째’만 반복하나 했다니까. 그런데 분명 환경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참 내…” 어떤 선배가 투덜대면서 환경학자인 내게 건넨 말이다. 시민운동가와 학자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논의를 하는 자리였나 본데, 참여자 한 분이 논의 대상이 될 만한 주제를 나열하면서 이 말을 꺼냈다고 한다. 환경 정책가와 학자, 시민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널리 퍼진 말, ‘넷째로’는 ‘net zero’를 좀 우악스럽게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요즘은 공식적으로 ‘탄소중립’이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이 말을 쓰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그림1.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흡수량이 동등할 때 ‘탄소중립’을 이룬다. 탄소중립이란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양과 흡수되는 양을 동등하게 해서 추가적인 탄소의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흡수는 산림이나 습지, 갯벌, 해양 식물과 같은 자연기반 흡수원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 저장하며, 자연기반 흡수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인위적으로 탄소포집이용저장(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 CCUS) 기술로써 제거하는 것까지를 말한다. 하지만 배출한 이산화탄소를 흡수 제거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우므로 배출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배출할 수밖에 없는 이산화탄소는 흡수함으로써 추가적인 배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탄소중립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기준으로 하지만 이산화탄소 이외 메탄, 아산화질소, 수소불화탄소, 과불화탄소, 육불화황, 삼불화질소 등 온실기체 모두의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기후중립(Climate Neutrality)이라 한다. 그런데 이때 온실기체 배출량을 이산화탄소 배출량으로 환산해서 계산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온실기체 순 배출량을 0으로 하는 것을 ‘탄소중립’이라 통칭해서 부르는 것이다. 심각한 기후위기 상황에서 국제사회는 2015년 12월 파리기후변화 협정(파리협정)을 맺어 지구 평균 온도를 산업화 이전 대비 1.5℃를 넘지 않도록 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 대비 1.5℃를 넘지 않으려면 전 세계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탄소중립은 국가 과제로 자리를 잡았다. 2020년 10월에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2021년 5월 대통령 소속 2050 탄소중립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이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이 제정되어 2022년 3월 25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탄소중립위원회는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2050년 탄소중립으로 가기 위해서는 징검다리가 되는 2030년까지 배출량을 얼마나 줄이는지가 관건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는 2018년 보고서에서 2030년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을 2010년에 비해 45% 줄여야 한다고 권고하였으며, 2022년 올해 4월에는 현재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은 1.5℃ 경로에 있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1.5℃로 온난화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2025년 이전에 온실기체 배출이 정점에 도달해서 2030년까지는 2019년 대비 43%를 감축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또한 2050년까지 2019년 대비 온실기체 배출을 84% 감축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항상 함께 뒤따라 나오는 용어가 바로 엔디시(NDC)이다. 원어는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번역하면 ‘국가 결정 기여’이다. 이는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중간 목표로, 파리협정에 따라 각 참가국이 스스로 정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의 경우 파리협정 채택 이전에 제시한 목표는 탄소중립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기에 더 높여야만 했다. 그래서 2021년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개최 이전까지 136개 국가가 새롭게 상향된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제출했지만 이 목표가 달성된다 해도 지구 평균 온도는 2.4℃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서 당사국들은 총회에서 채택한 글래스고 합의(Glasgow Climate Pact)를 거쳐 올해 2022년까지 더 강화된 목표를 제출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도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2030년까지 2018년 총배출량 대비 35% 이상 감축이라는 최저선을 넘어 40% 감축으로 상향된 목표를 발표하고, 보고서를 유엔기후변화협약에 제출하였다. 이 목표가 여전히 너무 느슨하다거나 너무 과도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파리협정의 진전 원칙(감축목표를 제시할 때 이전보다 진전된 목표를 제시해야 함)에 따라 목표를 뒤로 물릴 수는 없으며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하자면 지금부터 노력해서 속도를 높여 나가야 한다. 그림2. 2050년 탄소중립을 위해, 한국은 2030년까지 2018년 총배출량 대비 40% 감축을 목표로 한다. 한 번 배출된 온실기체는 온실효과를 한 번만 일으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기 중에 머무르면서 지속적으로 온난화를 일으킨다. 세계 온실기체 배출량의 75%를 차지해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이산화탄소는 50~200년 동안 대기 중에 체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15% 이상은 1000년을 넘게 머무른다고 한다. 그만큼 빠른 감축이 중요하다. 우리의 언어 환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공공 영역에서 사용한 외국어 용어가 한 번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퍼지고, 지속적으로 쓰인다. 이제 지구온난화나 기후변화란 말보다 기후위기란 말이 일반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2019년 5월 영국의 가디언지가 ‘기후변화’란 말 대신 ‘기후위기’라 부르자 제안하였다. 기후변화란 용어가 그 자체로는 변화의 방향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변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래서 그 변화에 대한 대응이 얼마나 긴급하게 요구되는지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기 상황을 해결해 나가고자 계획을 세울 때에는 변화의 심각성과 대응의 긴급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갈수록 깊어져 가는 기후위기는 이제 북극곰에게만 일어나는 일도, 먼 미래에 일어날 일도, 어디 가난한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바로 여기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현실이다.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이를 해결하고자 세운 목표를 국민들이 실천할 수 있으려면 용어의 의미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 누구나 이런 용어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생활 목표로 삼아야 그나마 살 만한 지구 환경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쉬운 말로 쓰자. 윤순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전 위원장,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전 위원장 <에너지란 무엇인가?>(2011)를 번역하였고, <기후 위기 시대의 도전과 교회의 응답>(2022), <서울을 바꾸다: 혁신가 박원순의 도시혁명 10년>(2021), <시민주도 코로나 대응>(2021), <포용한국으로 가는 길>(2021) 등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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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윤순진
- 등록일 : 2022.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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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핏’이 몰고 오는 신조어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최근 국내 한 대기업이 신입사원 채용에 ‘컬처 핏(culture-fit) 인터뷰’를 실시한다고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이 회사가 덧붙인 설명에 따르면 컬처 핏 인터뷰는 ‘쌍방향 소통 방식의 대화형 면접 제도’. 회사의 기존 조직원들이 지원자들과 대화하면서 얼마나 서로 문화적으로 어울리고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고 신규 인력을 뽑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컬처 핏’은 기업의 조직 문화 또는 그 기업이 추구하는 방향과 채용 대상자의 적합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업에서 지원자를 채용할 때 단순히 실력만 정량 평가하지 않고, 조직 구성원과의 교감, 소통, 조직과의 융화 등을 고려한다는 맥락에서 주로 쓰인다. 단어 자체만 보면 ‘문화’(culture)와 ‘적합함’(fit)을 결합한 말이니 그대로 풀어 쓰면 ‘문화 적합성’이다. 하지만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컬처럴 핏’(cultural fit)을 ‘컬처 핏’과 함께 사용하는 영미권에서도 넓은 의미의 문화를 두루 아우른다기보다 주로 조직이나 기업 문화와 연관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새말모임의 위원들은 다듬은 말 후보 일순위로 어휘 풀이에 충실한 ‘문화 적합성’을, 보편적으로 쓰이는 ‘조직문화 적합성’을 두 번째 후보로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후보 용어가 탈락했다. 먼저 ‘적합성’을 ‘적합도’로 바꿔 쓰는 방안. 둘 다 같은 의미이지만 ‘적합도’의 경우 얼마나 적합한지를 측정하는 ‘척도’와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적합성’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 외 ‘조직 융화성’, ‘조직 흡수성’, ‘조직 합류성’ 등도 후보로 떠올랐다. 의미는 모두 비슷하지만 ‘적합성’을 대체할 만큼 쉽고 익숙한 표현은 아니라 최종 경쟁에서 탈락했다. 다만 ‘핏’을 ‘어울린다’는 뜻으로 풀이한 ‘문화 어울림’은 순우리말이 곁들여진 신선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세 번째 후보로 올랐다. 사실 빈도를 따지면 컬처 핏이라는 용어는 2018년 처음 언론에 등장한 이래 아직 그다지 많이 쓰이고 있지 않다. 언론 검색으로는 50여번 정도 언급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2000명의 여론조사 응답자 중 절반 넘는 수(58.8%)가 ‘컬처 핏’이라는 용어를 이번 조사에서 처음 접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미 ‘~핏’이라는 표현은 해일처럼 우리 언어 생활에 밀려 들어오고 있다. 처음에는 ‘수트 핏’, ‘루즈 핏’(헐렁한 옷 차림새) 등 옷매무새를 나타낼 때 주로 쓰던 표현이 이제는 어느새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쓰이고 있다. 미용 용어로 ‘스킨 핏’, ‘뷰티 핏’, 운동 용어로 ‘파워 핏’, ‘헬스 핏’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가 하면 ‘이지 핏’, ‘스탠더드 핏’, ‘홈 핏’, ‘에어 핏’, ‘오토 핏’이라는 용어도 눈에 뜨인다. 이런 거센 ‘~핏’의 물결 속에 ‘컬처 핏’도 한몫을 하게 됐다. ‘아직은’ 많이 쓰이지 않는 표현이라고 해도 다듬어 볼 만한 용어였다고 생각한다. 시민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던 듯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중 76.4%가 ‘컬처 핏’이라는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새말 모임에서 제시한 대체어 중에서는 ‘조직문화 적합성’을 가장 적합한 새말로 선택했다(85.0%). ‘문화 적합성’(65.1%), ‘문화 어울림’(58.9%)이 선호도에서 뒤를 이었다. 새말모임의 위원들은 ‘컬처 핏’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풀이를 우선시했던 반면 시민들은 현재 일자리 시장에서의 쓰임새를 더 많이 고려한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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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안테나 숍’은 ‘탐색 매장’으로 지승호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인터뷰 작가) 안테나 숍? 안테나를 파는 상점인가? 안테나는 브라운관, 미사일, 로켓, 로봇, 컴퓨터, 스마트폰처럼 아예 우리말로 토착화한 말이 아닌가? 이걸 어떻게 고치지? 그러나 이런 말이 사실상 우리말로 더 굳어지기 전에 우리말 용어를 만들어서 제안하고 바꿔 쓰게 노력하는 것이 새말 모임 위원들의 일이니 다듬어 보기로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안테나 숍’은 “제조업체들이 자사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평가를 파악하거나 타사 제품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하여 운영하는 유통망을 이르는 말. 판매가 최우선의 목표인 일반 유통망과는 달리 제품 기획과 생산에 필요한 정보 입수를 우선 과제로 삼기 때문에 마치 공중의 전파를 잡아내는 안테나와 같은 기능을 하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라고 돼 있다. 신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기 전에 소비자의 선호나 반응을 파악해 반영하기 위해 운영하는 점포라는 뜻이다. ‘견본 주택’과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번에도 열띤 토론이 있었는데, 위원들은 간혹 황희 정승이 되기도 한다. 싸우는 두 하인들에게 모두 ‘네 말이 맞다’고 했던. 이 위원의 말을 들어 보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위원의 말을 들어 보면 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한 위원은 ‘간보기 점포’ 또는 ‘간보기 매장’을 제안했다. 또 한 위원은 파일럿 프로그램에 빗대 “안테나 숍이 파일럿 숍으로도 쓰이잖아요. 파일럿 프로그램이 맛보기 프로그램, 시험 프로그램으로 다듬어지듯이 ‘맛보기 점포’, ‘시험 점포’ 이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제안했다. 한 위원은 안테나라는 뜻 자체가 더듬이(절지동물의 머리 부분에 있는 감각 기관. 후각, 촉각 따위를 맡아 보고 먹이를 찾고 적을 막는 역할을 한다)라는 뜻도 있으므로 ‘더듬이 매장’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 후 ‘맛보기’와 ‘간보기’의 어감에 대한 의견들이 오갔다. ‘간보다’는 전남 지방 방언으로 음식이 아닌 사람에게 쓰일 때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는 의견도 나왔다. 파일럿 프로그램을 맛보기 프로그램이나 시험 프로그램으로 다듬은 것도 그런 비슷한 논의 과정을 거쳐 결정됐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맛보기 매장’이 후보로 먼저 선정됐다. 이후 탐색과 탐지 중에서 탐색은 뭔가 샅샅이 뒤진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고 탐지는 뭔가 가늠해 보는 의미가 있는데, 안테나의 의미와 연관한다면 탐지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어감으로는 탐색이 더 어울린다는 의견이 다수여서 탐색 매장이 후보로 채택됐다. 역전의 역전이었다. 촉각을 세우자는 의미로 “안테나를 계속 세우자”고 말한 한 위원의 의견에 회의 진행자는 “안테나를 후보로 올리자구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더듬이를 계속 세워 나간 위원들은 더듬이 매장을 나머지 후보로 정했다. 국민수용도 조사에서 ‘안테나 숍을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는 응답은 65.2%였고, 우리말 대체어 선호도는 ‘탐색 매장’이 74.8%로 가장 높았다. ‘맛보기 매장’(69.3%), ‘더듬이 매장’(19.7%) 순이었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지승호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인터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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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지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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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는 ‘구독 경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구독’이라고 하면 으레 신문 구독, 잡지 구독을 떠올릴 것이다. 과거에는 매일 배달해주는 신문의 구독료를 달마다 신문배달원이 받아 가면서 영수증을 끊어주었다. 그 뒤로는 지로용지가 오고, 그다음엔 자동이체로 구독료를 내다가 인터넷 검색 업체들이 신문 기사를 제공하면서부터 종이 신문 구독이 빠르게 줄었다. 신문 구독이 많이 사라지면서 ‘구독’이라는 말도 자취를 감추는 것 아닐까 했었는데, 어느 날 뜻밖의 동네에서 다시 이 말을 만나게 됐다. 비싼 옷을 구독하고, 화장품을 구독하고 심지어는 먹고 마시는 것도 구독한다는 구독 경제(購讀經濟·subscription economy)가 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무렵부터 화장품을 달마다 정기적으로 배송받아 사용하는 상거래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대체로 1개월 단위로 정해진 돈을 내고 정기적인 서비스나 물품을 이용하는 상거래 방식을 가리킨다. 바쁘게 사는 시대에 매장에 들러 뭘 사는 것이 번거롭고, 인터넷을 이용해 뭘 사려면 손품에 눈품을 팔아야 해서 더 귀찮은 세상이니 때가 되면 턱턱 알아서 가져다주는 이런 장사 방법이 환영받을 만하다. 달마다 종류를 바꿔가면서 고급 외제차를 빌려 타는 자동차 구독도 이뤄진다니 초기 투자에 발 묶이지 않고 다양하게 써볼 수 있는 장점도 구독 경제의 매력이다. 여러 술집이나 커피집을 한 달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술 구독, 커피 구독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구독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책이나 신문, 잡지 따위를 구입하여 읽음’이라는 풀이가 올라 있다. 우리가 아는 한자인 ‘읽을 독(讀)’은 활자로 된 기록물에 주로 쓰는 글자다. 오독, 정독, 속독, 다독 등의 예를 생각할 수 있다. 인터넷 영상 구독이야 눈을 써서 정보를 얻는 대상이 활자 매체에서 영상 매체로 바뀌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먹고 마시고 바르는 것까지 구독한다는 건 너무 어색하지 않은가. 확실히 잘못된 용법이다. 그렇지만 이는 새로운 현상을 가리키는 말을 정할 때 생길 수 있는, 어찌 보면 후세의 불가피한 오류 아닐까. 영어 단어 ‘subscribe’는 ‘구독하다, 가입하다, 청약하다, 기부하다’ 따위의 여러 가지 뜻이 있고, 그 명사형 ‘subscription’은 ‘구독료, 구독, 기부금, 가입, 모금’ 등으로 번역된다. 맥이 닿긴 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어감이나 의미가 다른 여러 행위를 영어에서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꼭 활자 매체만이 아니더라도 이용자로 등록해 정기적으로 돈을 내는 ‘subscription economy’에 딱 맞는 우리말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가장 비슷해 보이는 과거의 ‘구독’을 쓰기 시작한 것이리라. 논리적인 어휘가 익히기에 좋고 소통에도 좋겠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비논리적인 어휘들 가운데 소통력이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미팅’에서 가지 친 ‘소개팅’이나 ‘채팅’에서 가지 친 ‘눈팅’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버스 카드 충전과 전화기 충전의 ‘충전’은 한자가 다르지만 소리가 같고 의미가 비슷해 사람들은 같은 말이겠거니 하며 별생각 없이 사용한다. 외국어 신조어의 번역어를 만들 때 되도록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게 맞겠지만 그 경계를 어쩔 수 없이 또는 과감히 넘어서야 할 때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용감하게 새로운 말을 만들어 보자. 이제야 떠오르는데 우리 집도 이미 10여년 전부터 경남 어디 산골에 닭을 풀어 먹이는 양계장에서 3주마다 40개씩 달걀을 받아먹는다. 달걀값은 알아채기도 전에 자동이체로 나간다. 아, 이게 구독 경제였구나. * 이 글은 국민일보 <청사초롱>란에도 연재하였습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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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건범
- 등록일 : 202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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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에이지리스’는 ‘나이 무관’으로 지승호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인터뷰 작가) 그동안 새말모임 위원들의 활약과 노고에 중점을 둔 기사를 쓰면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다듬을 말 후보들을 선정하고, 그 후보군이 언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용례와 뜻풀이는 어떻게 되는지 등등 기초 자료를 꼼꼼히 조사해서 위원들에게 전해 주는 국립국어원의 노고가 빠져 있어서였다. 그뿐만 아니라 국립국어원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사전 또는 사후 조율을 통해서 국민수용도 조사를 한다. 이후 조사 결과를 참고해 다듬은 말을 선정한 뒤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발표하고 있다. 4월 새말모임에서 다루고자 제안한 용어는 스터디 투어(study tour),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 헝거 마케팅(hunger marketing), 에이지리스(ageless), 안테나 숍(antenna shop), 리추얼 라이프(ritual life), 캠테리어(camterior)였다. 뜻을 짐작할 만한 용어도 있었지만, 역시 생소한 용어들이었다. 이 중에서 새말모임의 위원들이 다듬고자 고른 용어는 무엇이었을까? 위원들도 어떤 때는 다듬기 쉬운 말을 고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한 위원은 다듬기 쉬울 것 같다는 이유로 ‘스터디 투어’를 다루자고 제안했지만, 상황은 그리 뜻대로 펼쳐지지는 않았다. 논의 끝에 고른 첫 번째 용어는 ‘에이지리스’였다. 에이지(age)는 ‘나이’고 ‘리스’(lease)는 ‘빌린다’는 뜻이니 나이를 빌린다는 뜻인가 싶었는데, 원어를 제대로 보니 ‘-이 없는, -의 영향을 받지 않는’의 뜻인 접미사 ‘리스’(-less)였다. ‘어떠한 선택에서 나이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에이지리스의 의미라고 한다. 패션에서 성별 구별 없이 착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젠더리스’와 비슷한 용어인 듯하다. 신문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용례로 사용되고 있었다. “과거보다 젊은 중장년층인 이들은 연령 구분 없이 누구나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에이지리스’ 패션을 선호하는데…”(서울경제 2022년 1월) “에이지리스는 뷰티 시장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데,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20~30대 젊은층에서도 건강하고 탄력 있는 피부를 유지하는 안티에이징 케어에 관심이 높아지는 분위기다.”(메디컬 투데이. 2022년 4월) 우리말 후보로 첫 제안은 ‘나이 불문’이었는데, ‘나이에 대한 관념이나 구별을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나이 파괴’가 제시되기도 했다. ‘나이 파괴’가 더 적극적이고 강한 표현이 될 것 같다는 이유였다. 또 나이를 무시한다는 의미에서 ‘나이 무시’, 연령을 초월하거나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초연령’, ‘탈연령’도 제시됐다. ‘나이야 가라’라는 재미있는 의견도 있었지만, 예전부터 농담으로 많이 쓰이던 것이라 탈락됐다. 노화 예방에 젊은층도 가세하고, 젊은 세대가 입는 편안한 옷차림을 중장년층도 좋아하는 등 나이에 무관하게 무언가를 선택하므로 ‘탈피, 타파, 파괴’보다는 ‘무관, 불문, 무시’ 쪽이 맞는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양쪽 모두를 후보로 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뒤늦게 ‘나이 넘어’라는 참신한 의견이 나와 많은 위원들의 호응을 받았다. 논의 끝에 탈연령, 나이 파괴, 나이 무관, 나이 넘어가 후보로 결정됐다. 국민들의 선호도는 어떻게 나왔을까? 국민수용도 조사에서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는 응답은 65.6%였고, 대체어 선호도는 ‘나이 무관’이 80.5%로 가장 높았고, ‘탈연령’(57.4%), ‘나이 넘어(39.9%)’, ‘나이 파괴(33.7%)’ 순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탈우리말’하지 않고, 외국어를 더 많이 쓰지 않고, 우리말과 무관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우리말을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지승호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인터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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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지승호
- 등록일 : 2022.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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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알 권리 보장할 말 쓰자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고 한다. 사람 하나가 빠지면 그만큼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는 속담이다. 말은 그 반대다. 든 자리는 표가 나도 난 자리는 모른다. 정부 당국자들이 외국어를 남용하면 저래도 되나 싶다가도 그걸 사용하지 않으면 평소에 외국어를 남용하는지 어떤지 눈치채기 어렵다. 코로나 사태가 터진 뒤 온갖 외국어가 등장했다. 코호트 격리, 팬데믹, 에피데믹, 엔데믹, 글로브 월, 드라이브 스루, 워킹 스루, 부스터샷, 트래블 버블, 포스트 코로나, 위드 코로나, 롱코비드…. 마치 국민 외국어 교육시키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거기에 평소 공무원들이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외국어 용어까지 가세해 사태 파악을 어렵게 만들곤 했다. 지난해 10월 중순 단계적 일상회복 지원위원회에서는 ‘단계적 일상회복 로드맵’을 제시하겠노라고 밝혔다. 그 얼마 전에 정부 관계자는 언론 등에서 수없이 사용하던 ‘위드 코로나’라는 말이 코로나와 함께 살아도 별문제 없다는 인상을 줘 방역에 혼란을 부를 위험이 있다고 보고 이를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사용해 달라고 당부했었다. 뜻이 모호하거나 국민이 잘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 용어가 정책 집행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이전의 경험에서 배운 결과였으리라. 그런데 그러고 나서 2주도 지나지 않아 ‘로드맵’이라는 용어를 덜컥 사용한 것이다. 로드맵은 당국자들이 즐겨 쓰는 외국어 단어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말일 게다. 이런 말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면, “아니, 로드맵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라고 반문하는 공무원도 있다. 하지만 2020년 한글문화연대 조사에 따르면 로드맵이 무슨 뜻인지 아는 국민은 54%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 절반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70대 이상의 국민 가운데에서는 겨우 14%만이 이 말의 뜻을 안다고 답했다. 한글문화연대에서 부랴부랴 문제점을 지적한 덕에 정부는 로드맵 대신 ‘이행 계획’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론 국민은 그런 소동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으리라.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안철수 위원장이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지난 4월 말 ‘코로나19 비상대응 100일 로드맵’을 발표했다. 사라졌던 로드맵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세부 실천 과제명과 설명에 ‘거버넌스’ ‘패스트트랙’ ‘롱코비드’ 등 다른 외국어 용어도 많이 사용했다. 이 밖에도 인프라(기반시설), 어젠다(의제), 가이드라인(지침) 등 우리말로 써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굳이 외국어 용어로 표현했다. 이 중 거버넌스는 국민 이해도 조사에서도 단지 15%만이 뜻을 안다고 답한 말이다. 내 느낌엔 이조차도 좀 부풀려진 수치다. 어려운 외국어를 사용하면 국민이 용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할 수 있다. 코로나 방역 대책은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에 새로운 코로나 대응 체계를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서는 국민이 알아듣기 쉬운 용어를 써야 한다. 특히 고위험군에 속하는 고령층이 어려운 외국어 용어 때문에 코로나 정보에서 소외돼선 안 된다. 이는 ‘코로나19 비상대응 100일 로드맵’의 실천 과제인 ‘고위험계층 보호’ 목표와도 어긋난다. 개인의 사적인 어휘 구사를 따지는 게 아니다. 공공 영역에서 외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외국어는 소외감을 넘어 모욕감을 주기까지 한다.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는 국어기본법 원칙을 잘 몰라서 그랬는지 110대 국정과제에도 ‘AI’ ‘R&D’ 등 로마자가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새 정부에서 명심해주길 바라건대, 언어는 인권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공공언어에서 쉬운 우리말을 쓰길 기대한다. * 이 글은 국민일보 <청사초롱>란에도 연재하였습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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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건범
- 등록일 : 20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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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로테크? 단순 기술!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부정적 선입견을 품게 하는 낱말이 있다. 분명 가치중립적으로 사용했는데도 어느샌가 ‘좀 열등한 개념’으로 느끼는 표현이다. ‘로테크’(low tech)라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다듬는 작업은 ‘선입견을 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로테크란 ‘차원이 낮은 단순한 기술이나 기본적인 기술’을 일컫는 말이다.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에서도 쉽게 제작하거나 수리할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다. 환경친화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이미 20년 전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널리 쓰이고 있는 말로, 언론에서는 ‘낮은 기술’, ‘과거 기술’, ‘단순 기술’에 심지어 ‘낡은 기술’로도 쓰이곤 한다. “요즘 소비자들은 최신 기술 못지않게 과거 기술에도 주목하고 있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하이테크에 비해 기술 수준은 낮지만 과거 향수를 자극하는 이른바 ‘로테크’ 제품”(동아일보 2021년 8월 9일자), “장애인들에게는 비싸고 접근하기 어려운 하이테크보다 ‘로테크’, 즉 그렇게 비싸지는 않지만 일상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서비스가 더 필요한 경우가 많다”(아주경제 2019년 1월 30일)와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최근에는 해킹이나 조작 위험이 큰 하이테크 대신 물증이 남고 개입 위험이 적은 ‘낡은 기술’, 즉 로테크로 선거를 치르자는 논설(조선일보 2020년 2월 14일자)도 나왔다. 그렇다면 로테크를 우리말로 옮길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은 무엇일까. 먼저 로테크라는 단어를 곧이곧대로 번역한 ‘낮은 기술’, ‘하위 기술’을 먼저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첨단 기술을 뜻하는 ‘하이테크’(high tech)에 대칭이 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비첨단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앞서 이야기한 고민이 시작됐다. 단어가 주는 부정적 느낌. ‘낮은 기술’(기술 수준이 높지 않다), ‘하위 기술’(기술 난도의 층위에서 아래쪽에 속한다)이라는 표현을 혹시라도 ‘열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지만 로테크를 기술의 다양한 층위에서 열등한 기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편물 기계로 만들어 낸 옷과 손뜨개로 만든 옷을 비교해 보자. 손뜨개질은 편물 기계의 작동만큼 복잡해 보이지 않고 인간의 노동 외 별도의 에너지를 요구하지도 않지만, 작업 자체의 기술이 편물 기계의 작동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편물 기계가 개발될 수 있는 ‘기본 기술’을 제공한 것이 손뜨개질이다. 그래서 새말모임의 위원들은 비록 ‘의미상 틀린 말’이 아닐지라도 혹여 부정적이거나 열등하게 느껴질 만한 낱말은 제외하기로 했다. 대신 ‘복잡하지 않고 접근하기 쉬워 요즘 그 가치가 새롭게 각광받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단순 기술’ 혹은 ‘기초 기술’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한편 로테크가 첨단 기술이 개발되기 전 단계에 쓰였고, 이들 기술을 바탕으로 하이테크가 발전했다는 점에서 전통 기술, 원시 기술, 원초 기술 등의 용어도 새말로 적합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들 표현은 시대에 뒤처진 느낌이 들 수 있다. 요즘 ‘로테크’가 디지털 첨단 기술을 대체해 급부상하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여러 논의 끝에 새말모임의 위원들은 ‘단순 기술’을 가장 적합한 대체어로 골랐고, ‘기초 기술’과 함께 ‘첨단 기술’에 반대되는 뜻으로 ‘비첨단 기술’을 다음 순위 후보로 올렸다. 국민 수용도 조사 결과 시민들은 ‘로테크’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 써야 한다는 데 73.1%가 동의했고, 가장 적합한 우리말 대체어로 ‘단순 기술’을 택했다(전체 응답자의 75.5%가 선택). 여담 한 가지를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한다. ‘로테크’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우리말 발음으로는 로테크라고 똑같이 표기하지만, 뜻이 다른 단어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로테크’(law tech)다. 법(Law)과 기술(Technology)을 결합한 용어로, 법률 분야에 빅데이터, 기계학습, 인공지능과 같은 정보기술을 융합한 기술이다. 로테크라고만 쓰면 독자들은 단순 기술과 법 관련 정보기술 중 어느 것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동음어인 ‘로테크’를 쓸 때마다 매번 영어 단어와 뜻을 병기해 줘야 할 것인가? 그러지 말자. 그럴 필요가 없다. 두 단어 모두 우리말로 쓰면 된다. ‘로테크’(low tech)는 ‘단순 기술’로, ‘로테크’(law tech)는 ‘법 관련 정보기술’로. 로테크를 서둘러 우리말로 순화해 써야 할 또 하나의 이유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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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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