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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어프리에 블라인드 하나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몇 년 전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사람들과 전화로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그 기관에서 연행사 제목이 ‘배리어프리 플레이 그라운드’였던가 그랬다. 우연히 이 광고문을 보았는데, 솔직히 나로선 무슨 뜻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의미를 물어본 뒤 꼭 이렇게 영어로 행사 이름을 지어야했냐고 따졌다. 실무 담당자는 자신이 정한 이름이 아닌지라 난감해하는 목소리였다. 곧 이 기관에 공문을 보내 이런 외국어 남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왜 그렇게 사용했는지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정말 어처구니없었다. 어떻게든 자기네의 용어 사용에 별 문제가 없다는 식의 변명뿐이었다. 시각장애인인 내가 작성했던 다소 격앙된 전체 질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는 2019년 10월 25~26일에 ‘배리어프리 플레이그라운드 페스티벌’이라는 제목의 행사를 치렀습니다. 이 행사는 우리 국민 누가 보더라도 이름만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고, 외국 장애인을 상대로 벌인 행사도 아닌 것으로 압니다. 1) 국어기본법 제14조 1항에서는 공문서를 작성할 때 공공기관 등은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을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문화체육관광부 국고를 지원받아 치른 행사에서 이런 식으로 외국어를 남용하여 외국어 능력이 낮은 장애인의 알 권리를 짓밟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2)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는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이 행사 이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는 첫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본 행사의 이름인 '배리어프리 플레이그라운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문화예술 교류의 장을 만들고자 기획한 행사입니다. '외국어 능력이 낮은 장애인'이라는 관점은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에 행사명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장애인의 알 권리를 차별하려는 의도는 없었음을 말씀드립니다. 본 행사에서는 장애인 및 고령자 등 다양한 관람객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큰 활자, 수어통역, 음성 해설, 휠체어 접근 등의 접근성 서비스를 제공하였습니다.” 물론 차별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이런 반응은 접근성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일까? 장애인의 접근성, 아니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의 ’접근성‘까지 고려한다면 그것은 몸으로 다가갈 수 있는 접근성 이전에 말과 글로 알리고 설명하였을 때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접근성이 먼저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이 일단 장벽일 텐데, 그런 언어 장벽을 세워두고 접근성을 말한다는 건 접근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반증 아닐까?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본 행사명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며 대체 표기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배리어프리] 라는 단어가 '장벽 제거 또는 완화'로 표기될 수 있지만, 장애인•비장애인을 떠나 사회적 약자의 사회 참여를 도모하는 의미로 한글 표기보다 사회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예술경험을 통해 물리적•심리적 장벽을 낮추고자 한 행사 의도와 내용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진짜로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을까? 이들의 이런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한글문화연대에서 2020년에 조사한 결과를 보면 ’배리어프리‘라는 말의 국민 평균이해도는 18%, 70세 이상 평균 이해도는 4%에 불과하다. 심지어 나는 장애인문화예술원 외에도 장애인인권재단에서 대학교수들을 동원하여 라디오 광고를 하며 ‘배리어프리’라는 말을 홍보하는 것까지 들었다. 왜 아니겠는가? 장애인은 물론이요, 비장애인들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니 예산을 들여 계속 홍보할 밖에. 해당 분야 학자나 전문가들이 자기들끼리 자주 사용하는 말인지라 사회적으로 널리 쓰인다고 착각하는 것이었리라. 나는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직원들이 질문의 핵심을 피하여 그 언저리를 붙잡고 답하는 걸 볼 때마다 이들의 국어 능력이 뛰어난 것일까 처지는 것일까 혼란스럽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참 드물다. 이들의 의식은 왜 이렇게 흘러갈까? 난 두 가지 추정을 했다. 첫째, 본인이 장애인이 아니고 장애인 단체에서 실무를 맡아보는 사람이기에 관점이 다를 수 있다. 둘째, 본인이 장애인이라면 장애인이라는 피해의식 같은 걸 가지고 있어서 이를 덮어버리기 위해 애써 영어를 써서 비장애인처럼 보이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지 어떤지 사실 여부는 나도 모르겠지만. 과연 ‘장벽 없는 세상’을 향한 장애인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소망은 ‘배리어프리’라는 말로밖에는 설명되거나 가리켜질 수 없는 것이었을까? 나는 중고교 시절에 영어 공부를 매우 열심히 했던지라 어느 정도 어휘는 기억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평소에 영어로 말하고 글을 쓰고 들을 기회가 별로 없으니 기억나지 않는 단어들이 이제는 많다.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대체로 그렇지 않겠는가? 장애 당사자로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인지 생각해볼 계기가 있었다. 비행기로 부산에 가려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는데 길이 막혀서 좀 늦었다. 허겁지겁 표를 받은 뒤 항공사 직원에게 내가 비행기 타러 가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곧 이 분이 무전기로 직원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런 말이 들려왔다. “블라인드 하나. 블라인드 하나.” 순간, 저 말이 나를 가리키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나는 왜 평범하게 ‘시각장애 한 사람’, ‘시각장애인 한 분’ 정도로 불리지 못하고 무슨 암호 코드처럼 ‘블라인드’로 지칭되어 단위마저 ‘하나’로 세어져야 할까? 아무에게도 부여하지 않는 이런 지칭은 나를 이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 자리에서 배제한다는 느낌으로 몰아갔고, 세상 사람들 앞에 홀로 발가벗겨진 채 서 있는 부끄러움 같은 걸 의식하게 했었다. 사실 나는 굉장히 뻔뻔한 편인데도 말이다. 내가 우리 주변에서 사용하는 우리말로 불리지 않는다는 건 내가 이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의 존엄은 평등하지만 세상이 평등하지 않듯이, 언어능력은 타고난다고 하지만 그렇게 타고나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시각, 청각, 인지 등 여러 분야의 장애가 선천적으로 또는 질병과 사고 때문에 생겨서. 물론 가정과 사회의 돌봄이 없거나 부족하여 그리되는 경우도 있다. 제나라 말이 그럴진대, 외국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경향적으로 장애인들에게는 새로운 정보, 특히 학습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터득하는 데에 비장애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외국어 학습에서도 당연히 이런 장애물이 있다. 외국어 사용 환경에 접할 기회도 상대적으로 적다. 어떤 어휘는 외국의 사회 제도에서 비롯하는 것인지라 그런 장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내가 장애인 활동지원 제도를 활용하면서 처음 만났던 암초가 바로 ‘바우처’라는 말이었다. 이 제도를 설명해주는 사회복지사가 바우처 어쩌고 하는데, 그때부터 가슴이 답답했다. 이게 뭐, 복잡한 제도인가 뭔가... 사실, 바우처는 ‘이용권’ 정도로 간단명료하게 번역하여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문화 분야와 복지 분야 등에서 전문가들이 거르지 않고 그냥 바우처라고 쓰다 보니 지금은 농식품바우처까지 나오고 있다. 농식품바우처는 생활 형편이 어려운 분들에게 제공되는 것인데, 이를 ‘농식품이용권’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쉽고 이해가 빠르겠는가? 공무원들은 민원인에게 두세 번 설명해줘야 하고, 이용자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말이면서도 알아듣는 것처럼 모래 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야 하니, 참으로 자존감 무너지는 상황이다. 말은 그저 무미건조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그 말을 매개로 작동하면서 차별과 배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 능력의 면에서 어떻게든 소외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끌어안으려는 공동체 의식, 나는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첫걸음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우리말을 쓰는 태도이다. * 이 글은 한국어문기자협회 <말과글> 172호에도 실렸습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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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가상 모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판박이 세상 이경은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대형 건물이나 미술관 같은 곳에 가면 작은 모형으로 건물 전체를 조감해 놓은 것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모형’이란 실물을 모방해 만든 물건이나 작품을 만들기 전에 미리 만든 본보기 같은 것이라서 우리는 그 모형을 통해 건물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한다. 전쟁 영화나 공상과학 영화에서도 실물 촬영이 어려운 장면을 찍을 때 많이 쓴다. 실제 부엌과 크기만 약간 작을 뿐 거의 비슷한 ‘모형 부엌’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이런 모형을 가지고 미리 체험해 보면서 자기 미래의 삶을 배워 가겠다는 생각이 든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모형은 이미 익숙한 생활 환경이다. 그런데 이 모형이 실물 세계에서 컴퓨터 가상세계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디지털 트윈은 현실 속의 어떤 사물과 똑같은 쌍둥이를 컴퓨터 가상세계 속에 만들고,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모의 실험해 결과를 예측하는 기술이다. 2010년에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우주선의 물리 모델을 위해 디지털 트윈 기술을 적용한 것이 최초이며, 이후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제조업에 디지털 트윈을 적용하면서 용어가 확산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토교통부와 한국국토정보공사가 한국판 뉴딜 발표를 계기로 올해 처음 시작하는 ‘디지털 트윈 국토’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 국토를 실제와 같게 3차원 가상세계로 구현해 지능형 국토 관리와 국민 삶에 맞춘 문제 해결을 꾀한다는 것이다. 제조업만이 아니라 농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 기술이 사용되니 이 용어도 자주 등장한다. 영어권에서는 ‘트윈’을 반드시 사람이나 동물에게만 쓰는 건 아니지만, 우리말에서 ‘쌍둥이’는 주로 사람이나 동물에 한정해 쓰는 어감이 있다. 그래서 새말모임에서도 직접적 번역어인 ‘디지털 쌍둥이’보다는 ‘디지털 복제’가 제안됐다. 복제란 원형 그대로의 것을 재생해 표현하거나 본디의 것과 똑같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이 어떤 경우에는 숫자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리키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가상의 세상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가상’의 뜻이 강하므로 ‘가상 복제’라는 말을 대체어로 생각할 수 있다. ‘복제’와 비슷한 말로, 판에 박은 듯이 매우 비슷하게 닮은 사람을 뜻하는 ‘판박이’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복제’라는 용어만으로는 ‘디지털 트윈’에서 구현하려는 기술이나 기능의 핵심, 즉 미리 모의 실험하기 위해 디지털 환경을 이용한다는 점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에 잘 맞는 말이 바로 ‘모형’이다. 모형은 ‘실물을 모방해 만든 물건이나 미술 작품을 만들기 전에 미리 만든 본보기 또는 완성된 작품을 줄여서 만든 본보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새말모임 위원들은 ‘디지털 트윈’을 대신할 말로 ‘가상 모형, 가상 판박이, 가상 복제’ 등의 세 후보를 내놓았다. 국민 2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3.6%가 ‘디지털 트윈’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했으며, 90.7%가 ‘가상 모형’으로 바꾸는 게 적절하다고 답했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이경은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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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스태그플레이션보다는 ‘고물가 경기침체’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경기침체(stagnation)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이 합쳐진 스태그플레이션은 경기 불황 중에도 물가가 계속 오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영국 정치가 이언 매클러드가 1965년 영국 의회의 연설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1970년도에 신문 기사에서 소개됐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근 영국의 매스컴에서는 영국 경제의 현실과 병폐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신어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중략) 영국 경제의 현실이 불경기의 상황 아래에서도 임금과 물가등귀가 심각하대서 생겨난 것이다.” ‘영국의 병폐’ 때문에 생겨났다는 ‘신어’ 스태그플레이션이 7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서까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이른바 ‘오일 쇼크’라 불린 세계 유가 폭등 때문이었다. 전 세계가 치솟은 기름값 때문에 호된 불황과 물가 상승에 시달렸고,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요즘 우리 경제에 깜빡이는 위기 신호 때문에 이 용어가 다시 언론에 자주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언론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해 왔을까.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 뒤에 괄호를 붙여 ‘경기침체 속 물가 상승’, ‘고물가 속 경기 불황’이라고 나란히 쓴 경우도 있고, ‘물가는 오르는데 경기는 가라앉는 스태그플레이션’, ‘경기 침체와 고물가가 동시에 닥치는 스태그플레이션’처럼 문장으로 풀어서 설명한 사례도 많다. 한편 스태그플레이션이 워낙 보편화되고 독자들에게 익숙한 용어라고 판단한 탓인지 일부 경제 전문지들에서는 아예 별도의 우리말 설명을 붙이지 않고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말로 풀어 쓴 용례가 많고 말뜻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용어인 만큼 이를 다듬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새말을 지어 낼 열쇳말은 두 갈래. ‘인플레이션’을 뜻하는 ‘고물가’와 ‘물가 상승’이 한 갈래이고, ‘스태그네이션’을 뜻하는 ‘경기침체’와 ‘불황’, ‘불경기’가 또 다른 갈래다. 새말모임 회의에서는 이 두 갈래 말들을 여러 방법으로 조합해 보며 가장 적절하다 싶은 세 개의 후보를 만들었으니 ‘고물가 경기침체’, ‘불경기 물가 상승’, ‘고물가 불황’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여론조사를 거쳐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고물가 경기침체’가 새로운 우리말로 결정됐다. 우리와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과 중국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어떻게 표기하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영어권 신조어가 들어오면 일본어로 바꾸어 표기하는 것보다 가타카나를 이용해 외국어 발음 그대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스태그플레이션 역시 가타카나로 표기(스다구후레-숀·スタグフレ?ション)할 뿐 일본어 표현이 따로 없다.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도 마찬가지인데, 일본 특유의 ‘줄임말 선호’로 ‘인후레’, ‘디후레’라고 줄여서 부르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신문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을 ‘불황 속의 인플레’라고 표현한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중국은 발음을 따르기보다 신조어의 뜻을 살려서 한자어로 바꿔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을 ‘수쯔’(数字) 혹은 ‘수마’(数码)로 바꿔 쓰고 있다. 스태그플레이션 역시 ‘정체하다’는 뜻의 ‘즈’(滞)와 ‘팽창하다’는 뜻의 ‘장’(胀)을 조합해 ‘즈장’(滞胀)이라고 바꿔 표현하고 있다. 참고로 중국어로 인플레이션은 ‘통화팽창’, 스태그네이션은 ‘불경기’라고 하며, ‘萧条’(샤오탸오)라고 표기한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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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노마드 워커? 유목민형 노동자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고 디지털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장소나 시간에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들이 속속 등장했다. 디지털 노마드, 잡(job) 노마드, 유로(Euro) 노마드, 노마드 워커 등이 그것이다. 표현은 여러 가지지만 사실은 대부분 같은 뜻이다. 그중에서 이번 새말모임은 ‘노마드 워커’(nomad worker)를 택해 우리말로 다듬어 보았다. 디지털 시대 이전에도 특정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있었다. ‘자유 계약직’ 혹은 ‘프리랜서’ 등이다. 하지만 ‘노마드’라는 말이 붙음으로써 기존 자유직의 성격에 노트북 컴퓨터나 태블릿 기기, 휴대전화 같은 휴대용 기기를 이용한다는 ‘디지털 시대적 특징’이 한층 더해졌다. ‘노마드’라는 단어 자체는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유목민’이란 뜻의 라틴어라고 하니 연륜이 퍽 길다. 이 오래된 단어가 철학적 용어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68년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누리는 새로운 인류를 가리키며 ‘노마디즘’이라는 말을 쓰면서부터다. 그러다 30여년 전 마셜 매클루언이 “인류는 빠르게 움직이며 전자제품을 이용하는 유목민이 될 것”이라고 미래를 진단하면서 ‘노마드=디지털 유목민’의 뜻으로 점차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미 ‘디지털 노마드’나 ‘잡 노마드’라는 용어는 우리 언론에 2000년대 초반 등장했고, ‘노마드 워커’는 그보다 한 발짝 늦은 2010년 서울경제 기사에서 처음 발견된다. 최근 들어서 ‘노마드 워커’라는 용어는 더욱 활발히 쓰이고 있으니, “노마드 워커 교육은 전국 최초로 시행되는 창조경제 프로젝트로 최첨단 디지털 시스템을 활용,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아시아투데이), “노마드 워커를 ‘어디에서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바일 보헤미안은 거기에 더하여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킨다.”(문화뉴스) 등이 그 사용 사례다. 앞선 글에서 같은 한자 문화권 나라들인 한국, 일본, 중국이 알파벳 언어권에서 들어온 신조어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고 이야기했는데, ‘노마드’의 경우는 세 나라가 모두 똑같이 ‘유목민’이라고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遊’자를 사용하는 반면 중국에서는 ‘游’로 표기하는 게 차이다). 또한 국립국어원에서도 ‘디지털 노마드’를 ‘디지털 유목민’으로 다듬어 발표한 바 있기에 ‘노마드’라는 단어는 ‘유목’ 혹은 ‘유목민’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겠다. 다만 ‘노마드’는 명사지만 맥락상 형용사형을 사용하는 게 맞겠고, 영어권에서도 형용사형인 ‘노마딕(nomadic) 워커’ 혹은 ‘디지털 워킹(working) 노마드’라고 쓰기 때문에 새말 역시 유목‘형’ 혹은 유목민‘형’ 등 형용사형으로 다듬었다. 그렇다면 ‘워커’의 대체어로는 ‘근로자’와 ‘노동자’ 중 무엇이 적절할까. 현재 우리나라 노동 관련 법규에는 ‘근로기준법’ ‘근로자보호입법’과 같이 ‘근로’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고, 법정기념일인 5월 1일 역시 ‘근로자의 날’이 공식 명칭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근로자’라는 명칭 사용에 비판적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근로자(勤勞者)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정부나 사측이 사회주의 계열에서 주로 사용하는 ‘노동자’라는 단어 대신 의도적으로 선택한 용어라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5월 1일도 ‘근로자의 날’이 아니라 ‘메이데이’(May Day) 혹은 ‘노동절’이라고 부른다. 새말모임에서는 다양한 시각을 고려해 ‘노동자’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2000명 중 62.2%가 ‘노마드 워커’를 쉬운 우리말로 바꿀 것을 원했고, 후보 낱말 중 ‘유목민형 노동자’가 57.6%의 지지를 받고 새말로 선정됐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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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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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상용도시 부산의 한글날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한국어 단일 언어에 익히기 쉬운 글자 한글을 사용하다 보니 편하게 사는 걸 모르고 허황된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 여러모로 억울하다는 열패감에 빠져 어떻게든 영어로 사회 발전의 길을 터보겠다는 야심을 지닌 자들이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갈등이 더욱 증폭되는 다민족 다언어 사회와 비교해 우리의 말글살이가 얼마나 행복한 환경인지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경쟁력’ 논리만으로 모든 것을 재려 한다. 1990년대 말에 영어를 공용어로 정하자는 주장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박형준 부산시장이 부산을 영어상용도시로 만들어 ‘글로벌 허브 도시’로 우뚝 세우겠다고 한다.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발상인데, 그러면 지금까지 한국은 어떤 경쟁력으로 여기까지 왔단 말일까? ‘상용’이란 ‘일상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으로서, 예를 들어 영국과 미국의 주요 민족인 ‘앵글로-색슨’에 대해 사전에서는 ‘영어를 상용하는 국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일상 생활이든, 직장 생활이든, 공공기관에서든 영어를 늘 사용하는 것이 바로 상용이다. 한국은 ‘한국어를 상용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부산을 ‘일상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도시’로 만들겠다니…. 부산시는 단어의 개념조차 잘못 이해하고 있다. “시의 영어 상용화 정책은 영어를 의무적으로 쓰는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를 많은 시민이 쉽게 쓸 수 있는 환경을 넓히는 방향”이라고 부산시는 설명한다. 공용은 의무이고, 상용은 의무 아니니 겁먹지 말라는 투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심각한 착각이다. 공용어란 ‘한 나라 안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인데, 이 공용어 사용의 ‘의무’는 공공기관에 부과되는 것이지 결코 시민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공공기관에서는 국민이 공적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보장하고 공적 업무를 원활히 처리할 수 있도록 공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처럼 공용어가 한국어 하나인 나라에서는 공공기관에서 한국어를 써야지 외국어를 쓰면 안 된다. 싱가포르처럼 공용어가 4개인 다민족 다언어 국가에서는 공공기관에서 네 개의 공용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의무화해 어떤 말을 쓰는 국민이든 공적 정보를 얻고 공적 용무를 처리할 수 있게끔 보장한다. 싱가포르의 공용어가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네 가지라고 해서 거기 국민들이 네 개의 언어를 모두 사용해야 하는 ‘의무’를 지는 게 결코 아니다. 공용어 사용의 의무는 공공기관에서 지는 것이다. 공용어 사용 의무에 대한 오해도 그렇지만, 부산시의 생각과 달리 ‘공용어’보다도 ‘상용어’가 시민에게 더 강압적이고 의무적일 수 있다. 정책 당국자의 정책 의도가 개입되어 강제적으로 추진될 때 그렇다. 1910년 강점 뒤 일제는 조선 땅에서 모든 행정 문서와 법률 문서, 조선어과목을 제외한 교과서를 일본어로 작성했다. 공직 관리들에게 업무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무였다. 부산시 용법대로 하면, 이게 바로 ‘일본어 공용’이다. 그러다 일제는 1938년부터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전쟁 동원을 위해 일본어 교육을 대단히 강화하고, 1942년부터는 ‘일본어 상용’을 민간의 운동으로 펼치는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식민지의 국어는 일본어였으니, 이를 ‘국어상용운동’이라고 불렀다. 모든 조선어교육은 폐지되고 관공서는 물론이요 학교와 거리, 가정에서조차 일본어를 쓰도록 했다. 조선어를 쓰면 벌금을 물리고 가족 간에도 신고를 장려했다.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펼친 이 시기가 바로 ‘일본어 상용’ 시대이니, 공용보다도 상용이 더 폭력적이고 전면적이었던 것이다. 부산시에서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를 유치하려 애쓰면서 이런 정책을 내놓은 속내는 짐작이 간다. 시민들이 늘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면 외국인 손님맞이에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여기가 정말 국제적인 도시라고 어깨에 힘을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이야말로 모기 잡으려고 아파트 불지르는 꼴이다. 일제의 총칼로도 쉽지 않았던 것이 외국어를 상용하게 하는 일이었다. 일제 36년으로도 모자랐으니, 싱가포르처럼 100년은 넘게 식민지 생활을 해야 가능해질 일이리라. 부산시가 원하는 게 이런 강압적인 영어상용인가? 필자가 보기엔, 일반 시민의 영어 능력을 잣대로 국제 도시인지 어떤지 도시 수준을 평가하려는 발상부터 매우 시대착오적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보고 싶은 게 한국어 쓰는 한국인들의 문화이지, 어설프게 영어로 대접하려 안간힘 쓰는 안쓰러운 모습은 아닐 것이다. 만일 부산시의 ‘영어상용’이 영어 잘하는 시민들 좀 늘리자는 정책이라면 ‘상용’과 같은 무시무시한 용어부터 버려야 한다. ‘영어 잘하는 시민 늘리기’ 정책으로 이름을 바꾸되, 다른 지자체에서 이미 실패로 끝난 영어마을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예산을 낭비해선 안 된다. 철저히 학생과 시민의 자발적 수요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또한 강제로 영어를 상용하게 할 게 아니라면, 전국에서 가장 영어남용이 심한 부산시의 공공언어 사용 풍토부터 고쳐야 한다. 마린시티, 에코델타시티, 문탠로드 등 지역 이름을 영어로 짓는 도시는 부산밖에 없다. 물론 부산시민이 아니라 공무원들이 저지른 일이지만.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정책 이름과 행사 이름, 공공시설 이름, 공문서 용어에 영어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곳도 부산시청이다. 이런 곳에서 ‘영어상용’을 외치니, 이는 시민의 알 권리 침해이고, 우리말글 억압이며, 한류 죽이기 정책으로 치달을 것이 뻔하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의도는 ‘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펴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에 맞닿아 있는 ‘언어 인권 의식’이다. 한문시대, 국한문혼용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는 한글전용 시대,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시대이다. 그 한글과 단일언어 한국어로 소통이 너무도 편했던 우리 사회에 박 시장이 불통과 차별의 높은 벽을 세우고 있다. 쓸 일이 있어서 영어 공부하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문제는 꼭 필요한 사정이 아님에도 우리 일상 생활에 영어를 들여오려는 이상한 노력들이다. 영어상용도시 부산을 꿈꾸는 사람들의 욕망 아래 부산시민들은 한글날을 어떻게 느낄까 궁금하다. *이 글은 주간한국에 실렸습니다. (http://week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7074364)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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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뉴 스페이스’는 ‘민간 우주 개발’로 지승호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인터뷰 작가) 인간은 늘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달에 토끼가 있다는 낭만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고, 지구의 자원이 부족해지는 염려에 대안으로 다른 행성의 자원을 활용할 수 없는지, 나아가서는 화성 같은 곳에서 인간이 살 수는 없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해 왔다. 닐 암스트롱이 달 착륙에 성공한 이래 우주 개발은 강대국들과 정부의 몫이었다. 첨단 과학기술력과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2022년 누리호 발사를 성공시킴으로써 세계에서 자력으로 우주로켓을 발사한 11번째 나라가 됐다. 그리고 그 흐름은 이제 민간기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우주항공산업에 진출한 대표적인 민간기업으로는 스페이스엑스, 블루오리진, 버진갤럭틱 등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 기업은 아니다. 가장 먼저 설립된 기업은 2000년에 아마존의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가 설립한 블루오리진이라고 한다.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앨런 셰퍼드의 이름을 딴 뉴 셰퍼드로 유명한데, 오로지 관광 목적으로 개발 중인 발사체다. 2015년 4월 첫 실험에서는 발사체 회수에 실패했지만, 그해 11월 두 번째 실험에서 발사체와 캡슐을 재활용하는 데 최초로 성공했다. 스페이스엑스의 ‘팔콘9’이 착륙한 12월보다 한 달 빠른 성공이었다. 지금은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스페이스엑스가 더 활발히 나서고 있다. 이들 회사는 2021년 우주 관광에 성공하면서 민간 우주 관광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고 있다. 이렇듯 정부 주도의 우주 개발 사업에서 민간기업 주도의 우주 개발 시대가 열렸다. 정부 주도의 우주 개발을 ‘올드 스페이스’(old space)라고 하고 이에 대비로 민간기업 주도의 우주 개발 사업을 ‘뉴 스페이스’(new space)로 부른다고 한다. 뉴 스페이스는 국가 소유로 여겨졌던 발사체와 위성 분야 기술이 개방되고 생산 비용이 절감되는 등 우주항공산업의 생태계가 변화하면서 국가와 거대 기업이 주도하던 우주항공산업이 민간·중소 기업으로 이전되는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업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새말 모임 위원들도 발 빠르게 ‘뉴 스페이스’를 우리말로 대체하기 위한 논의를 했다. 영어 단어로만 보면 아주 단순하다. 새 우주. 우리말로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러나 새 우주라는 말로는 어떤 점에서 이전과 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이의가 제기됐다. 논의한 끝에 위원들은 낱말의 본래 의미를 충실히 살린 ‘민간 우주 개발’과 낱말을 직역해 간단하게 부를 수 있는 ‘새 우주’ 두 가지를 후보로 채택했다. 이제 국민들이 선택할 차례다. 수용도 조사에 참여한 국민들은 직역으로 된 낱말보다는 낱말의 본래 의미가 잘 드러난 ‘민간 우주 개발’을 매우 높은 비율(90.9%)로 선택했다. 직역한 말보다는 의역한 말 들었을 때 바로 어떤 내용인지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낱말이 선택된 것 같다. 참고로 ‘뉴 스페이스’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는 응답은 72.9%가 나왔다.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지승호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인터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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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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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그루밍 성범죄’는 ‘환심형 성범죄’로 지승호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인터뷰 작가) ‘그루밍 성범죄’,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피해자와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가해자를 잘 따르도록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가출 청소년 등 범죄에 취약한 층을 대상으로 잠자리나 음식 등을 제공해 호감을 산 뒤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해 성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그런 예다. ‘가출 도우미’를 자처하며 가출한 여학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겠다고 접근해서 그들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그루밍(grooming)은 마부(groom)가 말을 빗질하고 목욕시켜 말끔하게 꾸민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원래 동물의 털 손질, 몸단장, 차림새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고양이가 자신의 몸에 묻은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혀로 온몸을 핥거나 이빨, 발톱으로 털을 다듬는 행동을 고양이 그루밍이라고도 한다. ‘안면 트기 대화’라는 뜻의 ‘그루밍 토크’(grooming talk)라는 말에서도 보듯이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새말 모임의 위원들은 ‘그루밍’만을 따로 다듬어야 하나, 성범죄까지를 포함해야 하나 고민했다. 논의 끝에 ‘그루밍’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으로 쓰이는 면이 많이 있어서 ‘그루밍 성범죄’라는 용어를 다듬어 제안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안이 나왔다. 길들이기 성범죄, 길들임 성범죄, 사로잡기 성범죄, 환심형 성범죄, 유인형 성범죄, 꼬드김 성범죄. 토의 끝에 ‘길들이기 성범죄’와 ‘환심형 성범죄’를 후보로 제안하기로 했다.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그루밍 성범죄’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에 64.4%가 응답했고, 우리말 대체어로 ‘환심형’ 성범죄를 1순위로 선택했다(75.8%). 환심형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피해 당시에는 자신이 성범죄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교사와 학생, 성직자와 신도, 의사와 환자 등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례가 많다. 교사, 성직자, 의사, 직장 상사, 복지기관의 담당자 등이 자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거역할 수 없는 자신의 권위를 범죄에 이용하는 것인데,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면에서 가정폭력범과 같이 죄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죄질이 나쁜 범죄용어를 어려운 외국어보다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는 우리말로 붙여 설명해야 범죄 예방에 더욱 효율적일 것이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지승호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인터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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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지승호
- 등록일 : 202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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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여행 규칙 아닌 ‘트래블 룰’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외국어로 된 신조어를 문장 속에서가 아니라 앞뒤 맥락 없이 만났을 때 종종 그 뜻을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트래블 룰’(travel rule)이 바로 그랬다. 고백하건대 처음 이 용어를 접했을 때 당연히 여행 용어인 줄 알았다. 코로나 대유행 이후 외국 여행에 제약이 많아지면서 생겨난 규약이나 제도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금융 용어였다. ‘트래블 룰’의 뜻은 “온라인에서 가상자산이나 자금을 주고받을 때 자금 세탁 등을 방지하기 위해 주고받는 사람의 정보를 기록하게 하는 원칙”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산의 이동에 대한 제도를 일컫는 말에 ‘유통’, ‘거래’, ‘자금이동’ 등의 용어를 쓰지 않고 하필 ‘여행’이라는 말을 써서 헷갈리게 했을까. 이는 이 용어가 미국에서 ‘직수입’됐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트래블 룰’이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자주 들리게 된 것은 최근이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존재한 용어다. 미국에서는 1970년 자금 세탁 방지를 위해 ‘은행 보안법’(혹은 은행 비밀유지법(BSA·Bank Secrecy Act))을 만들었고, 1996년 자금이 이동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는 규제를 강화해 이 법안에 추가했으니 이것이 ‘일명’ 트래블 룰이다. ‘일명’에 작은따옴표를 넣은 것은 정식 법규 명칭이 아니라 미국에서 역시 별칭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존재한 용어가 우리 언론에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6월 이후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가 이 법규의 대상에 암호화폐, 즉 가상자산을 추가하면서다. 그러다 올 3월 25일 국내에서도 특정금융거래정보법에 따라 가상자산 거래에 이 규칙을 적용하면서 국내에서의 용어 사용이 봇물 터지듯 늘어났다. 미국에서 30년 가까이 실시돼 온 제도가 가상화폐로 규제 대상을 확대하고 국내까지 도입되면서 제도와 함께 그 별칭까지 따라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길들지 않은 표현이다. 우리 언어문화에서는 돈의 이동을 ‘여행’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이 여행한다는 것인지, 규칙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도 이 용어만을 놓고 보면 파악하기 어렵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도 이를 잘 보여 준다. 2000명의 응답자 중 92%가 넘는 이들이 ‘트래블 룰’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거나, 들어 본 적은 있으나 예상했던 것과 다른 뜻이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 용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고치면 원래 이 제도가 가진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간 우리 언론에서 트래블 룰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함께 쓴 우리말 표현을 훑어 보자. ‘자금이동 규칙’, ‘전신 송금의 원칙’, ‘전신 송금 시 정보 제공’, ‘자금 추적 규제’ 등이 있다. ‘코인 (금융) 실명제’라는 별명을 붙인 경우도 있지만, 원래 이 제도가 가상자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 자산 일반에 적용됐던 것임에 비춰 볼 때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새말 모임에서는 기존에 쓰여 온 여러 표현을 바탕으로 ‘송금 정보 기록제’라는 새말을 다듬었다. 즉 이 용어가 ‘돈의 흐름(송금)’에 관한 제도이며, 그중에서도 ‘정보 기록을 통한 투명성 확보’를 목표로 했다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 주었다. ‘트래블 룰’(말 그대로 보자면 여행 혹은 이동 규칙)이라는 은유적 표현과 달리 더이상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하게 그 뜻이 전달되는 용어다. 아쉬운 점은 이렇게 일곱 글자로 명료하게 뜻을 전달할 우리말 표현을 제시할 수 있는데도 제도 시행 때 이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올해 3월 금융위원회는 이 제도의 시행을 놓고 “가상자산의 이전과 함께 송수신인 관련 정보를 의무적으로 제공하도록 하는 제도(트래블 룰)가 본격 시행된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제도 시행을 앞두고 미리 우리말을 다듬어 두었다가 공식적 제도 이름으로 발표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앞으로 이렇게 외국의 기존 제도를 들여와 국내에서 시행할 때는 여러 관련 기관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적절한 우리말 용어를 마련해 제도 시행을 발표할 때부터 분명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면 하는 바람이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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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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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네버 코비드’가 아닌 ‘코로나 비감염’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새로운 현상, 새로운 상황에 닥치면 이를 표현하기 위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언어가 만들어지곤 한다. 코로나의 세계적 대유행 역시 이 질병과 관련된 여러 신조어를 만들어 냈으니, 그중 하나가 오늘 살펴볼 ‘네버 코비드’(never COVID19)다. ‘네버 코비드’는 “코로나19에 한 번도 확진되지 않은 상태, 혹은 코로나에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용례를 살펴보면 살짝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아직 코로나에 걸려 본 적이 없는(그러니까 언제라도 걸릴 가능성이 있는) 상태 혹은 사람”이란 뜻이다. “(코로나 재유행이 오면서) 2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코로나19에 안 걸린, ‘네버 코비드’ 시민들 불안도 높아지고 있다”(머니투데이 2022년 7월)란 기사가 그 예다. 한편 “네버 코비드란 코로나 바이러스에 노출돼도 코로나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원인으로 다른 유형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교차 면역, 유전적 차이, 점막 면역 차이, 환경적 상황 차이가 있다”(동아일보 2022년 5월)는 기사를 보자. 앞선 기사의 맥락과 달리 ‘아직 안 걸린 게 아니라 감염 가능성 자체가 낮은 사람’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어떤 의미로 사용하든 우리 언론에 올 5월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최근까지 무려 1만 8000번 넘게 언급될 만큼 널리 사용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얼마나 많이 쓰는 말일까. ‘네버 코비드’는 구글 영문판에서도 검색된다. ‘노비드’(Novid, No-covid의 축약어), ‘코비드 버진’(covid virgin) 등의 표현도 눈에 띈다. 하지만 “네버 해브/해드(have/had) 코비드”라고 풀어 쓴 경우에 비해 검색 수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게다가 ‘네버 코비드’는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사용했던 ‘네버 트럼프’란 구호를 보면 알 수 있다. “트럼프는 (절대) 안 된다”라는 뜻이다. 보통 ‘네버’(never) 뒤에 명사가 붙으면 “~은 안 된다(반대한다)”로 해석된다. ‘네버 코비드’도 마찬가지다. ‘코비드’가 명사인 만큼 “코비드는 절대 안 된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철저한 방역을 다짐하는 구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런데도 굳이 ‘네버 코비드’라는 표현을 써야 할까? 우리가 지금까지 이 지면에서 살펴본 다른 신종 외국어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표현을 쓸 특별한 이유는 물론 없다. 시민들의 의견도 같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7.8%가 ‘네버 코비드’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응답했다. 게다가 ‘네버 코비드’ 대신 적절한 우리말도 계속 쓰여 왔다. ‘코로나 비감염(자)’ 혹은 ‘미감염(자)’이 그것이다. 여론조사에 응답한 시민들 역시 ‘네버 코비드’를 ‘코로나 비감염’으로 바꾸는 데 77.2%가 적절하다고 답했다. 이 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문화체육관광부는 ‘코로나 비감염’을 ‘네버 코비드’의 공식적인 대체어로 발표했다. 잠깐, 여기서 ‘비감염’과 ‘미감염’의 차이를 알아보자. 비슷한 표현이지만 다름이 아예 없지는 않다. 사전상 의미를 찾아보면 ‘비감염’은 “다른 개체로의 전염 가능성이 없는 것”을 뜻하고, ‘미감’(未感)은 “병 따위에 아직 감염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앞서 ‘네버 코비드’의 두 가지 용례 중 ‘코로나 강력 면역체’는 ‘비감염자’에 해당되고,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미감염자’에 가깝다. 하지만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사람 일반’은 비단 강력 면역체가 아니라도 ‘현재 다른 사람에게 전염성이 없다’는 뜻에서 ‘비감염자’라는 표현을 써도 무관할 것이다. 앞서 새로운 시대 상황 혹은 현상이 새로운 말을 낳는다고 했다. 코로나 발발 이후 정말 많은 코로나 관련 신조어가 나타났다. ‘코로나’는 고유한 바이러스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말 대체어로 바꿀 수 없어 그대로 사용하는 외국어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외국어를 쓰자 여기 덩달아 불필요하게 영어를 앞뒤로 붙이는 부작용이 속출했다. ‘롱 코비드’(코로나 감염 후유증), ‘코로나 블루’(코로나로 인한 우울), ‘코로나 레드’(코로나로 인한 분노) 등이 그것이다. ‘코로나’라는 고유명사는 어쩔 수 없이 사용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말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나 보통명사까지 영어로 덧붙여서야 되겠는가. 안 될 일이다. 게다가 이 같은 ‘나쁜 관습’은 앞으로도 새로운 영어 고유명사가 도입될 때 반복해 나타날 수 있다. 특별히 경계하고 멀리해야 마땅할 일이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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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2.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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