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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약칭 제안 모임', 나서서 줄임말을 만든다고?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올 3월 10일에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어문기자협회,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이 뜻을 모아 ‘우리말 약칭 제안 모임’을 꾸렸다. 국립국어원도 협의에 참여한다. 각 단체에서 추천한 연구위원들이 모여 4월 7일에 첫 회의를 열어 운영 방안을 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를 영문 이름 약칭인 ‘오이시디(OECD)’로 쓰는 일이 많은데, 이 대신 ‘경협기구’와 같이 우리말로 줄인 이름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게 잘 먹힐 일인지, 아니면 욕 먹을 일인지 모르겠다. 무수한 줄임말 신조어 때문에 정신 사나워서 줄임말이라면 손사래치는 분이 많은데, 나서서 줄임말을 만들겠다니 말이다. 줄임말 문화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그 말뜻을 바로 알아채기 어려운 상태에서 대화가 진행되다 보니 우선 소통이 어렵고 그 다음엔 내가 뭔가 뒤처지는 건가 싶어 주눅이 든다고 한다. 모르는 말이 등장할 때 누구나 흔히 겪는 사정이다. 그렇지만 이건 못 알아듣는 줄임말이 등장했을 때의 일이고, '기재부(기획재정부), 대입(대학입시), 경북(경상북도)'처럼 이미 알고 있는 줄임말이 나온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용어들이 줄임말이라는 자각도 별로 없으리라. 그러니 새로 나온 줄임말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말의 출현 횟수, 접촉 횟수, 사용 횟수가 얼마나 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익숙해지면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자주 쓰는 말이라면 외국어건 상말이건 차별어건 혐오 표현이건 모두 정당하고 사용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살이의 변화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피워갈지 고민하는 일은 여전히 쉽고 바른 소통을 꾀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다. 젊은 세대가 주도하고 있는 줄임말 문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말을 줄여 쓰는 것이 좋으냐 안 좋으냐 하는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말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의미가 어렵고 낯선 말은 되도록 줄여 쓰지 않는 게 좋다. 말을 줄여 빠르고 간단하게 전달하려는 ‘경제성’과 말이 길더라도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달하려는 ‘소통성’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는데,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들 수는 없다. 말을 줄이려는 욕구나 말을 줄여 새말을 만드는 방법은 매우 오래된 언어 사용법이고, 여러 가지 현상과 개념과 기술과 느낌이 얽히고설켜 가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새로운 것들을 표현하는 데에 말 줄임은 불가피한 것 같다. 사실, 30년 전에도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우심깜뽀하(우리 심심한데 깜깜한 데 가서 뽀뽀나 하까?)와 같은 줄임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칭, 약어, 은어 차원에서 수많은 줄임말이 사용되었다. 요즘의 세태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의 압축 정도와 사용 빈도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하다. 이런 말 줄임 현상이 아직은 비공식적인 영역에서 득세하고 있지만, 언젠가 지금의 젊은 세대가 공식 영역의 언어를 좌우하게 될 가까운 미래에 공식 영역, 공공언어 영역에서도 좀 더 깊이 들어올 거라고 본다. 지금도 윤핵관, 검수완박 등 정치권의 공식 언어에서 줄임말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넓게 보자면 전 세계적으로도 줄임말 문화는 하나의 대세로 굳어지는 분위기 아닌가 싶다. CPTPP, IPEF, FOMC 등 도무지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국제기구의 로마자 약칭이 국제무대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아무런 거름 장치 없이 그냥 쓰인다. 이런 말들 앞에는 ‘줄임말’이라는 장벽과 ‘외국글자’라는 두 개의 장벽이 서 있다. 서너 개의 외국 단어로 이루어진 이름의 머리글자만 딴 이런 약칭을 앞에 놓고 그 정체를 추측하기란 첩보영화에 나오는 암호 해독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지면이나 화면의 제약, 시간의 제약 때문에 줄일 수 있는 무엇이든 줄이려 한다. 이런 태도는 언론에 주의를 기울이는 공무원이나 기업에도 영향을 준다. 처음에는 온 이름을 쓰고 괄호 속에 로마자 약칭을 병기한 뒤 본문에서는 약칭을 쓰다가, 조금 지나면 처음부터 약칭만 사용한다. 특히 방송 보도가 그렇다. 이런 로마자 약칭 대신 쓸 우리말 약칭이라도 개발해야 하는 게 그나마 공식 언어 영역에서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로 ‘유엔’, 또는 ‘UN’이라고 사용하는 ‘국제연합’을 부를 때 일본에서는 ‘국련’이라고 줄여 부른다. 중국에서는 ‘나토, NATO’라고 우리가 주로 부르는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줄여서 ‘북약’이라고 부른다. 우리 언론에서도 미국의 중앙은행에 해당하는 ‘미 연방준비제도’를 ‘FRB, FED’로 쓰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요즘은 ‘미 연준’으로 줄여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로마자 약칭으로 부르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처음엔 이상하고 어설퍼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신문과 방송에서 ‘미 연방준비제도’를 언급한 뒤에 ‘미 연준’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미 연방준비제도’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잇고, 그리하여 ‘미 연준’을 들으면 그것이 미국 어떤 연방 기구의 하나라는 추측이 시작되어 그 다음에는 이를 일치시킬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적어도 ‘아이피이에프(IPEF)’’와 ‘인태경협구상’ 가운데 ‘인도태평양경제협력구상’이라는 온 이름으로 접근해 가는 데에 어느 것이 더 유리할지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줄임말 문화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진정시킬 건 진정시키고 좀 더 모호함을 줄일 수 있는 건 줄이는 게 필요하다. * 이 글은 한글학회 <한글새소식>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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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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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MC’를 ‘공시위’로 부른다면? 원승연(명지대 경영학과 교수) 미국의 금리가 우리나라 통화정책과 금융시장에 영향을 많이 미치다 보니 언론에서 미국의 정책 변화를 자주 보도한다. 그러면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줄여 부르는 ‘미 연준’이라는 이름은 이미 익숙해졌는데, 최근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에프오엠시(FOMC)라는 이름이 자주 나온다. 금융 전문가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정체를 추측할 만한 아무런 실마리가 없어서 일반 국민에게는 암초일 것이다. 이 이름도 ‘미 연준’처럼 우리말로 뭐라고든 줄여 부르면 안 될까? 먼저 ‘FOMC’의 정체부터 살펴보자. 통화정책은 국민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비록 중앙은행이 이를 담당하더라도 다양한 국민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상위의 의사결정기구인 위원회를 두어 결정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렇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회사의 지배구조에 비유할 때 한국은행이 집행임원과 직원으로 구성된 집행기구라고 한다면 금융통화위원회가 최종 결정을 담당하는, 사외이사 등을 포함한 이사회인 셈이다. 그런데 미국은 연방제 국가라 우리와 많이 다르다. 한국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으로서의 집행기구인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이 12개 있으며, 연방정부 내 독립기구로 연방 차원의 통화정책을 집행하는 연방준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가 존재하는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다. 연방준비은행과 연방준비이사회의 기능은 분리돼 있으나, 이 둘을 합쳐서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과 같은 집행기구라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준’이라고 지칭하면 연방준비은행, 연방준비이사회, 연방준비제도 중 어느 하나 또는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특정 연방준비은행이나 연방준비이사회를 지칭해야 한다면 ‘뉴욕 연준’ 또는 ‘연준 이사회’처럼 구체적으로 가리켜야 한다. FOMC는 통화정책을 최종 결정하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ederal Open Market Committee)의 약칭으로, 이사회에 해당하는 기구다. 우리나라의 금융통화위원회와 유사한 최종 의사결정 회의체 기구다. 넓게 본다면 이 기구도 연방준비제도의 일부이므로 그 행위 주체를 ‘연준’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특정 위원회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가령 기준금리를 0.5%로 인하한다면 그 결정은 금융통화위원회가 하지만, 대체로 한국은행이 금리를 인하했다고 표현한다. 최종 의사 결정을 하는 이사회가 나라마다 그 명칭이 달라서 이를 직역할 것인가, 아니면 고유명사로 보아 그 나라의 언어 또는 약칭으로 표현할 것인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전문가 처지에서는 괜한 번역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을 염려해 외국의 원어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사실 미국 통화정책의 주체를 간단히 ‘미 연준’이라고 표현하면 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 현학적인 취향의 사람들이 굳이 FOMC를 들먹이는 듯하다. 꼭 써야겠다면 이를 FOMC라고 부를지 아니면 ‘연방공개시장위원회’를 줄여 ‘공시위’처럼 우리말 약칭을 사용할지 선택해야 한다. 내가 보기엔 전문가적 정확성보다 대중의 이해를 중심으로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문적 용어가 대중화 될 때에는 일반인이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칭 표현은 경제학자보다는 국어학자나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용어를 고민해서 결정해야 할 일인 듯하다. 경제학자로서는 FOMC를 표현하는 국어의 규범이 정해진다면 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 이 글은 서울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출처: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 공식 누리집) 원승연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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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원승연
- 등록일 : 20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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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자체 제작물, 오리지널 콘텐츠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오늘 살펴볼 말은 ‘오리지널 콘텐츠’(original contents)다. 인터넷동영상서비스(오티티)나 전자책 서점 등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 공개하는 제작물을 가리킨다. 연원을 따져 보면 지금부터 무려 20년 전인 2002년 처음 우리 언론에 등장해 지금까지 5만번이 넘게 쓰인 표현이다. 처음 디지털타임스에 이 표현이 나타났을 때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Use)라는 개념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웹, 모바일, 디지털 티브이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유통(멀티 유즈)할 수 있는 하나의 원천 제작물(원 소스)을 가리키는 게 바로 ‘오리지널 콘텐츠’였다. 이후 수입 영상물을 주로 방영하던 국내 위성방송, 케이블 방송에서 수입품이 아닌 ‘자체 제작 국산 프로그램’을 만들어 선보이기 시작할 때도 이를 ‘오리지널 콘텐츠’라고 표현했다. 요즘 이 표현을 워낙 자주 사용하다 보니 언론에서 다룰 때도 우리말 풀이를 덧붙여 주지 않는 편이다. 대신 ‘자체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식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알고 보면 ‘콘텐츠’는 꽤 까다로운 단어다. 사실 영어 콘텐트(content)는 원래 ‘내용/내용물’ 일반을 두루 가리키는 단어다. 그런데 1990년대 말 이른바 닷컴 시대가 오면서 ‘각종 유무선 통신망을 통해 제공되는 디지털 정보’를 특정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이다. ‘콘텐트’에 복수형을 나타내는 ‘s’를 붙인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구글 영문판에서 ‘original contents’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수정되어 ‘original content’만 검색된다. ‘오리지널 콘텐트’가 올바른 표현인 것이다. 어째서일까. 여기서 의미하는 콘텐트는 불가산(不可算) 명사, 즉 한 개, 두 개라는 식으로 셀 수가 없는 명사이기 때문이다. 복수형으로 쓰이는 ‘콘텐츠’라고 하면 ‘용기 안에 들어 있는 (셀 수 있는) 내용물들’이라거나 ‘(책의) 목차’를 일컬을 때 사용된다. 혹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나온 것처럼 ‘만족스러운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content’에는 ‘만족하다’, ‘만족스럽다’는 의미도 있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콘텐츠’로 굳어 버린 이 단어는 우리말로 다듬는 것도 만만치 않은 까다로운 외국어다. 디지털 제작물로서 ‘콘텐츠’를 바꿔 쓸 적절한 우리말이 찾아지지 않는 바람에 아직도 웬만한 다듬은 말에 ‘콘텐츠’라는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콘텐츠 리터러시’를 ‘콘텐츠 문해력’ 혹은 ‘콘텐츠 이해’로 다듬은 것이 그 예다. 하지만 이번에 살펴본 ‘오리지널 콘텐츠’는 그간 대체물을 찾지 못해 ‘콘텐츠’라는 단어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비교적 쉽게 다듬은 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바로 그간 언론에서도 많이 사용해 온 ‘자체 제작물’ 혹은 ‘자체 제작한 작품’이라는 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 ‘오리지널 콘텐츠’가 사용됐던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맥락에서는 대체하기 어려운 표현이긴 하겠으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의미에서는 잘 맞는 표현이라 하겠다. 새말모임에서는 ‘자체 제작물’ 외에도 ‘고유 제작물’이란 말을 후보로 올렸는데, 국민수용도 조사 결과 ‘자체 제작물’이 무려 89.5%라는 높은 지지율로 최종 다듬은 말로 결정됐다. 그간 ‘콘텐츠라는 단어를 대체할 말은 없다’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깼다는 점에서도 값진 성과였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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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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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하락 전환과 피크 아웃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어려운 외국어 신조어를 우리말로 다듬는 새말 모임의 성과물을 이 지면에 소개한 지 어느덧 1년이 돼 간다. 그간 스무 개가 조금 넘는 우리말을 이 지면을 통해 선보였다. 그런데 이번처럼 언론에서 우리말 설명을 각양각색으로 덧붙인 외국어는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많이 쓰이고는 있으되 우리말로 표현하기는 까다로운 용어라는 얘기다. ‘피크 아웃’(Peak Out)이 주인공이다. ‘피크 아웃’이란 고점(peak)을 찍은 뒤 빠져나온다(out)는 뜻으로, 경기나 주식이 최고점을 찍고 하락 국면에 접어드는 상황을 일컫는다. 영어의 뜻 자체만으로는 경기나 주식 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몸 상태나 운동 기량 등 여러 방면에서 최고 상태를 기록하고 내리막에 막 접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 용어로만 사용되는 편이다. 반대말은 ‘보텀 아웃’(bottom out). 흔히 ‘바닥을 쳤다’는 식으로 풀이되는 말이다. ‘피크 아웃’이 우리 언론에 처음 쓰인 시기는 2000년으로 해당 기사는 다음과 같다. “경기 주도 업종의 재고순환으로 볼 때 경기는 이미 정점에서 내려가고(Peak-Out) 있으며 늦어도 3분기 중에는 피크 아웃할 것으로 예상된다.”(머니투데이 2000년 8월) 우리말 설명 뒤에 영문으로 ‘peak-out’이라는 표현을 괄호 속에 제시하고, 다시 문장 뒤에서 우리말 발음을 반복해 배치한 셈이다. 이후 20년 동안 주로 경제지나 종합일간지 경제면에서만 주로 쓰였는데도 검색 수가 무려 5만번이 넘었으니 실로 많이 쓰이기는 했지만, 정착된 우리말 순화어는 없다. 그래서인지 앞서 말한 것처럼 정말 다양한 우리말 설명이 붙었다. ‘정점 통과 후 하락’, ‘고점 대비 하락’, ‘고점을 치고 둔화되는 것’, ‘정점을 지나는 것’, ‘고점을 친 것’, ‘하강 기미를 보이는 것’, ‘최고 시세까지 올라 더이상 오르지 못함’, ‘고점 후 하락세 돌입’ 등등. 가만 살펴보면 우리말 설명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기업 이익이 정점이라는 피크 아웃’(연합인포맥스 2009년 10월), ‘정점에 이르고 있는 피크 아웃 상황’(뉴스토마토 2022년 11월)은 정점에 올랐다는 상황을 주로 강조하고 아직 하강 국면에 접어들지 않은 것처럼 표현한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추진력이 떨어지는 피크 아웃’(머니투데이 2010년 9월) 식으로 정점에 대한 언급 없이 하락 국면만 강조하는 표현도 있다. 한 개 혹은 두 개 단어로 이뤄진 우리말 표현만 살펴보아도 여러 가지 조합이 뒤섞여있다. ‘고점 도달’, ‘경기 정점’, ‘정점(고점) 통과’, ‘하락 전환’, ‘고점 후 하락’ 등이 그것이다. 한편 “반도체 업황의 고점(peak out) 우려”처럼 아예 한 단어로 대체한 경우(한국경제TV 2018년 7월)도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고점’ 혹은 ‘정점’ 같은 표현은 ‘벗어났다’는 뜻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부적절한 쓰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새말모임 위원들도 ‘피크 아웃’이라는 용어가 품고 있는 여러 상황 중 어떤 성격을 강조할 것인가 고심한 끝에 ‘고점을 지났다’는 상태를 나타낸 ‘고점 통과’와 ‘탈정점’, 그리고 ‘내리막이 시작됐다’는 상황을 강조한 ‘하락 전환’이라는 세 개의 말을 후보로 정했다. 굳이 용어가 아니라도 ‘정점을 찍고 내리막이 시작됐다’는 문장으로 풀어 써 주는 것이 말 자체도 쉽고 뜻을 전달하는 데도 유리하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용어로서 다듬은 말의 실제 쓰임을 고려할 때 간결성도 중요하기 때문에 아쉬우나마 명사형 단어 조합을 찾아낸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 시민들은 ‘하락 전환’에 80%가 넘는 지지를 함으로써 이 같은 시도에 호응했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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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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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예술과 꾸미기 그 어디쯤, 아쿠아스케이프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두 개 이상의 단어를 결합해 만들어 낸 신조어 중에서 적잖은 경우가 그렇듯이 ‘아쿠아스케이프’(aquascape)는 참 여러모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이다. ‘Aqua’(물)와 ‘Landscape’(풍경)가 합쳐져 탄생한 표현인 만큼 이들 두 단어의 뜻을 다양한 맥락으로 이해한 풀이말들이 눈에 띈다. 우선 메리엄 웹스터 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연못이나 분수 등 인공적으로 조성했거나 자연 상태의 아름다운 물가 풍경” 또는 “수초나 바위 등을 이용해 실제 물속 풍경같이 수조를 꾸미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네이버 사전을 검색해 보면 “물속에서 그린 해양 생물 그림”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다소 엉뚱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쿠아스케이프’라는 단어 하나하나의 뜻만을 놓고 볼 때 아예 틀린 해석이라 할 수도 없다. 이 중 오늘 우리가 살펴볼 좁은 의미의 ‘아쿠아스케이프’는 바로 ‘수조 꾸미기’다. 예시를 보면 이렇다. “단순히 어항 속 물고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수초와 자갈, 계곡과 폭포 그리고 조명까지 넣은 수조를 아름답게 꾸미는 ‘아쿠아스케이프’도 하나의 예술품으로 주목받고 있다.”(시빅뉴스 2020년 11월) 사실 수조 꾸미기는 현대인의 취미로 제법 오래전부터 자리 잡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물속 정원 꾸미기’는 1930년대 네덜란드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취미라고 하며, 2000년대 들어서 예술적인 차원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아쿠아스케이프’라는 용어는 수조 꾸미기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다. 2006년 이데일리에서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등재된 신조어’라며 ‘아쿠아스케이프’를 처음 소개할 때도 이 글 앞부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연못이나 분수 등을 갖춘 지역’이라고만 밝혔다. 2014년에도 ‘아쿠아스케이프’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하는데, 이 역시 앞서 말한 세 번째 뜻, 즉 ‘바닷속 풍경을 그린 그림 전시회’의 뜻으로 사용됐다. 이번에 다룰 뜻으로 ‘아쿠아스케이프’가 소개된 첫 사례는 머니투데이 2019년 8월 19일자. 미술을 전공한 작가가 국제 수경 예술 콘테스트에서 입상하는 등 수조 꾸미기를 예술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다. 2018년 10월 스포츠경향 기사에서는 ‘아쿠아스케이프’라는 표현은 쓰지 않은 대신 같은 작가를 ‘아쿠아스케이퍼’(아쿠아스케이프를 하는 사람)라고 소개했고, 그의 작업을 ‘수경 예술’, 그리고 그가 상을 받은 대회를 ‘국제 수초레이아웃 콘테스트’라고 표현했다. 이후 ‘아쿠아스케이프’라는 용어는 거의 쓰이지 않다가 2020년 들어 사용이 조금 늘어 지금까지 국내 언론 기사에는 70여회 등장했다. 그 와중에 쓰임새에서 다소 혼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브라보마이라이프(2022년 5월) 기사를 보면 “교육부에서도 올해 수산 양식, 수산업 경영 분야 등 아쿠아스케이프(수경예술)에 대한 기초 지식과 실무 능력을 익힐 수 있는 내용의 교과서를 개발”이라고 쓰였는데, 지금 우리가 검토하는 ‘수조를 예술적으로 꾸미기’라는 뜻에서 볼 때 ‘수산 양식’이나 ‘수산업 경영 분야’가 과연 연관 사업일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새말모임에서는 ‘아쿠아스케이프’ 작가들이 모여 만든 단체 ‘한국수경예술학회’도 현재 운영되고 있는 데다 갈수록 수조 꾸미기의 예술성이 부각되고 있으니 다듬은 말로도 ‘수경 예술’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이를 일순위 후보로 올리며 그와 함께 ‘수조 꾸미기’, ‘수생 조경’ 등의 표현을 다듬은 말 후보로 함께 선보였다. 여론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수생 조경’이 응답자들한테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것이다. 아무래도 일정 수준의 기술과 전문 지식을 갖춘 이들이 전유하는 ‘예술’보다 일반인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로서의 ‘조경’이라는 표현에 좀더 친근함을 느낀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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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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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워크’는 시민들이 국제관계에 관심을 가지도록 할 수 있을까? 정태석(전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요즈음 국제관계에서 협력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표현하는 용어로 ‘프레임워크’라는 외국어가 종종 등장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 등에서도 볼 수 있고, 또 ‘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라는 기후변화 협약에서도 ‘프레임워크 컨벤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프레임워크(framework)’는 프레임(frame)과 워크(work)의 합성어인데, 프레임은 구조물의 뼈대나 틀을 의미하며 워크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어떤 작업의 얼개나 짜임새’ 정도가 되는데, 한자어로는 ‘골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레임워크가 어떤 작업과 관련되어 있는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아서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데, 이런 이유로 우리말 번역어를 일률적으로 정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학문적 연구 활동을 시작할 때 학자들은 연구를 어떻게 진행해 갈 것인지를 구상하게 되는데, 이때 연구를 위한 ‘프레임워크’를 짠다고 말한다.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개념들을 선택하고 이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를 상상해보면서 해석이나 설명의 기본 틀이 될 개념들의 얼개를 짜보는 것이다. 이처럼 학문적 구상은 서로 연관되는 개념들을 인과관계의 흐름에 따라 배치해보는 과정인데, 이것을 ‘conceptual framework’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개념 틀’쯤 된다. 그렇다면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나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에서 프레임워크는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는 것이 좋을까?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는 인도양과 태평양 지역에 있는 나라들이 경제적 교류를 위해 협력하는 조직을 말하는데, 이때 프레임워크는 교류조직이나 협력조직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래서 인도-태평양 ‘경제 협력조직’, ‘경제 협력틀’, ‘경제 협력체’와 같이 쓸 수 있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는 생물다양성 보존을 목적으로 여러 나라가 서로 협력하기 위한 체계를 말하므로,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는 ‘생물다양성 협력체계’나 ‘생물다양성 협력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에서 프레임워크는 협약(convention)을 수식하는 단어로서 기후변화에 관한 ‘뼈대가 된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기본이 되는 틀’이라는 의미에서 ‘Framework Convention’은 ‘기본 협약’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1. IPEF는 '인도-태평양 경제 협력조직/경제 협력틀/경제 협력체'로 쓸 수 있다. (출처: 산업통상자원부 공식 블로그) 이처럼 ‘프레임워크’는 하나의 통일된 번역어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또 뼈대, 골격, 틀과 같은 우리말을 그대로 살려 ‘인도-태평양 경제 골격’이나 ‘생물다양성 틀’로 번역하는 것도 너무 어색해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될 것 같지 않다. 결국 의미도 살릴 수 있고 사람들이 사용하기에도 어색함이 적은 번역어를 찾는 것이 최선일 텐데,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의미에 맞춰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거나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프레임워크를 직역하면 뼈대, 골격, 틀이 되겠지만, 맥락에 따라 의미를 살려본다면 협력틀, 조직틀, 협의틀, 실행틀 등으로 옮겨볼 수도 있고, ‘틀’ 대신에 ‘체’나 ‘체계’를 넣어 협력체(계), 조직체(계), 협의체(계), 실행체계 등으로 옮겨볼 수도 있겠다. 2022년 12월 2일, 한글문화연대는 ‘로마자 약칭 대응 방안-우리말 약칭 만들기’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오늘날 세계화가 확대되고 국제 교류가 늘어나면서, 국제협력 조직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세계시장경제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기후 위기나 전염병 등으로 지구적 협력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어서 앞으로 로마자 약칭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누가 무슨 일로 어떤 협력체를 만들었는지를 쉽게 알지 못한다면, 좋은 의미로 만든 협력체들이나 거기서 맺어진 협약들은 시민 대중의 관심을 받기 어렵다. 그래서 이름만 봐도 금방 알아챌 수 있는 우리말 약칭을 만드는 일이 꼭 필요하다. 물론 이 일은 누가 도맡아 할 수는 있는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한글문화연대의 ‘우리말 약칭 만들기’ 활동은 공공의 공간에서 시민 대중이 알기 쉬운 말을 사용하자고 하는 ‘공공언어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다. 서로서로 좋은 우리말 번역어를 제안하려고 노력하고, 다양한 번역어들이 서로 경합하며 좋은 번역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말은 말뜻을 쉽게 알아챌 수 있으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더 좋은 공공언어가 될 것이다. 그림2. 누가 무슨 일로 어떤 협력체를 만들었는지를 쉽게 알지 못한다면, 좋은 의미로 만든 협력체들이나 거기서 맺어진 협약들은 시민 대중의 관심을 받기 어렵다. (출처: 로이터 연합뉴스) 정태석 전북대학교 사범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비판사회학회 <경제와사회> 편집위원, 한국환경사회학회 감사,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역임 저서로 “시민사회의 다원적 적대들과 민주주의”, “행복의 사회학”, “한국인의 에너지, 평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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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정태석
- 등록일 : 202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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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헤드라이너의 우리말 찾기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새말 모임에서 다듬을 말 목록을 받으면 일단 풀이를 보지 않고 외래 용어만 읽은 뒤 뜻을 가늠해 보곤 한다. 대중문화에 과문한 탓인지 이번에 다룰 ‘헤드라이너’(headliner)라는 단어를 보고는 공연문화와 관련된 표현이라고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신문 표제(headline)에 등장한 유명인사’ 혹은 ‘신문 표제 기사를 쓴 기자’ 정도를 떠올렸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절반만 맞았다. 위 두 개의 짐작 중 후자의 뜻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듬을 말은 그 의미로 쓰인 게 아니었다. ‘행사나 공연 등에서 가장 기대되거나 주목받는 출연자, 또는 그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보통 공연의 최고조에 등장해 무대를 장식하거나, 공연을 홍보할 때 가장 크게 부각되는 출연자, 혹은 출연진을 일컫는다. 영어사전에서 ‘신문 표제를 쓴 기자’ 다음으로 소개된 우리말 해석이 바로 이 뜻이었다. ‘헤드라인’은 신문의 표제어라는 명사로 쓰이는 것 외에도 ‘공연 등에 주요 출연자로 나오다’는 뜻의 동사로 쓰인다. 여기에 ‘~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er’을 붙인 게 ‘헤드라이너’다. 공연을 소개하는 안내 전단지에서 제일 큰 글씨 혹은 제일 돋보이는 사진으로 실리게 되는 인물이니 매체만 신문이 아닐 뿐 ‘표제에 등장한 유명 인사’라는 뜻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표현이 우리 언론에 등장한 연혁은 제법 길다. 1999년 연합뉴스의 어느 록 음악제를 소개하는 기사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는 ‘주 공연자’라는 설명이 괄호 안에 붙었다. 이후 이 단어는 몇 년간 언론 기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는데, 2004년 이후 자주 등장했다. 이때부터 기사에 나타난 우리말 번역은 다양하다. ‘주 공연자’라고 풀었다가 ‘주 공연팀’, ‘대표 가수’, ‘주역’, ‘대표 출연자’ 등 시기에 따라, 언론사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그 외 ‘간판 출연자’, ‘주요 출연진’, ‘대표 음악가’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가 하면 ‘가장 좋은 무대를 장식하는 팀’, ‘대형 공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메인 밴드’ 등 문장으로 풀어서 설명해 준 기사도 보였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헤드라이너’라는 단어를 쓰면서 아예 아무런 우리말 설명을 붙이지 않은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이미 모든 독자가 이런 단어의 뜻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거나, 문맥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일까. 그런데 여론조사 응답자 중 68.9%가 이 단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 모든 이들이 이 단어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해도 되도록 우리말 표현을 갈고 다듬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헤드라이너’를 갈음할 수 있는 적절한 우리말은 무엇일까. 새말 모임의 우리말 다듬기는 외래 용어를 대신해 쓰이는 대체어가 있는 경우 그들 중 쓰임이 많거나 뜻이 가장 잘 전달되는 것을 골라내는 데서 출발하곤 한다. 대체해 사용한 표현이 없는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표현을 채택하기도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우리말이 있다면 이를 최우선으로 검토해 보는 것이다. ‘헤드라이너’의 경우 이미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많은 순화어 후보들이 사용된 터라 새말모임 위원들은 이들을 먼저 살펴보았고, 그 가운데 ‘대표 출연자’와 ‘간판 출연자’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후보로 ‘핵심 출연자’도 함께 제시했다.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82.5%가 가장 적절하다고 선택한 ‘대표 출연자’가 최종 다듬은 말로 결정됐다. ‘헤드라이너’를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는 ‘신문 기사 표제를 쓰는 기자’라는 설명은 안 보이고 ‘자동차 지붕의 내부 천덮개’라는 뜻이 대신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말 검색을 해봐도 신문 관련 용어는 거의 찾을 수 없고 자동차용품으로 심심찮게 검색된다. 한편 중국어에서 헤드라이너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찾아보면 ‘터우파이’(?牌)라는 번역이 자주 발견된다. 과거 중국에서는 고전극을 공연할 때 출연자 이름을 팻말에 써서 걸어 놓았는데, 그중 맨 앞에 걸어 놓은 팻말이 바로 ‘토우파이’이며, ‘주연’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맨 앞자리’라는 뜻에서 동서고금이 이래저래 비슷한 용어를 쓰는 셈이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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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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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커리어 하이를 대신할 우리말은?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이번에 새말모임에서 다듬은 ‘커리어 하이’(career high)는 의외의 복병이었다. 용례를 보면 무슨 뜻인지 금세 이해하겠고, 대체할 우리말도 금세 찾을 수 있을 듯싶었다. “○○○은 체코 후스토페체 실내 대회에서 2m 36㎝를 넘어 커리어 하이를 경신했다”(오마이뉴스 2022년 10월), “홈런 줄었지만 타율·안타는 ‘커리어 하이’ 찍는 ○○○”(스포츠동아 2022년 9월) 등의 기사에서 보듯이 ‘최고 기록’을 뜻하는 말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뜻으로 영어권에서도 ‘커리어 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국내 언론에서는 2003년 외국의 야구 선수 기록을 소개하면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예고하고 있다”는 표현을 쓴 이래 주로 운동 경기 관련 기사에서 2만 6000번 넘게 사용했다. 그렇다면 그냥 ‘최고 기록’이라는 말로 다듬으면 되는 게 아닐까? 더 궁리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막상 국어사전이나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뜻풀이를 찾아보면 그게 아니었다. 국립국어원 개방형 사전인 ‘우리말샘’에서는 ‘커리어 하이’를 “체육 운동에서, 선수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시기. 또는 그런 것”이라고 풀이하며 “커리어 하이가 너무 일찍 온 것 아니냐는 우려는 올 시즌 활약으로 가뿐히 날려 버렸다”(마이데일리 2016년 9월)는 용례를 소개했다. 위키백과에서는 “스포츠 종목에서 개인이 가장 잘했던 시즌, 또는 그런 것을 말한다”고 풀어 썼고, 국립국어원에서 새말모임에 제공한 뜻풀이도 역시 “주로 운동에서 선수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시기를 이르는 말. 가수 등 연예인의 활동 성과에도 쓰인다”라고 설명했다. 위 세 가지 뜻풀이에 따르면 ‘커리어 하이’의 ‘커리어’는 ‘기록’이 아니라 ‘시기’를 일컫는 말이며, 따라서 ‘커리어 하이’는 ‘최고 기록’이 아니라 ‘최(고)전성기’라고 다듬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고민의 지점이었다. 용례를 더 꼼꼼히 찾아보면 실제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2007년의 스포츠조선 기사에는 “커리어 하이란 야구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은 성적을 낸 시즌을 뜻한다”라며 특정 ‘기간’을 가리킨다고 콕 집어 명토 박고 있고, 2002년 11월 기사에서도 “군 복무 후 2019년은 기록 면에서 ○○○의 커리어 하이였다”며 경력 중 일정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썼다. 영어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콜린스 사전에 예문으로 나온 다음 문장을 보자. “We‘ve experienced a lot of career highs and lows together….”(The Sun 2020) 우리말로 푼다면 “우리는 많은 경력의 오르내림을 함께 경험했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도 ‘커리어’는 ‘기록’이라기보다 ‘경력 자체’를 뜻한다고 보는 게 맞겠다. 한편 최근 들어 국내에서 이 용어는 연예인들에게도 쓰이기 시작했는데, 모 여성 그룹이 외국의 음원 순위에서 몇 위를 차지해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는 식으로 주로 사용됐다. 하지만 연예 기사 역시 “그의 연기 인생에서 커리어 하이를 맞았다”(퀸 2022년 11월)는 표현처럼 ‘최전성기’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니 ‘커리어 하이’는 ‘최고 기록’이라고 단순히 바꾸기는 어렵다. 그래서 새말모임에서 역시 ‘기록’에 집중할 것인가 ‘기간’이라는 의미도 고려해야 하는가를 놓고 의견을 나눴고, 결국 ‘더 많은 용례’에 근거해 새말을 다듬기로 결정했다. 우리 언론의 사용례를 보면 ‘커리어 하이’를 ‘최고 기록’이란 의미로 쓴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같은 기록을 세운 최전성기를 가리킬 때는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맞았다’는 식으로 ‘시즌’이라는 표현을 함께 쓰는 게 관례처럼 굳었기 때문이다(‘시즌’이라는 표현도 우리말로는 ‘때’, ‘시기’라고 고쳐 써야 하겠으나, 운동 경기에서 한 해 성적을 집계할 때 사용하는 시간 단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대로 사용한다). 그래서 새말모임이 다듬어 선보인 우리말 후보는 ‘최고 기량’, ‘최고 성적’, ‘최고 기록’이었다. 그중 여론조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최고 성적’이 다듬은 말로 확정됐다. 물론 간혹 ‘시기’를 나타내기 위해 ‘커리어 하이’라는 말을 쓰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때는 ‘최전성기’라는 말을 사용하면 되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면 특정 여성 그룹의 최근 활약을 소개한 언론 기사를 살펴보니 여러 매체가 일괄적으로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 두세 곳의 매체가 사용했다면 우연이라 하겠으나 10여개 매체가 똑같은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겼거나, 제1 보를 보낸 통신사 기사를 그대로 쓴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보도자료를 인용하거나 통신사 기사를 줄기 삼아 기사를 쓰는 것은 관행이라 하더라도 굳이 쓸 필요 없는 영어 표현을 여러 언론 매체들이 하나같이 옮겨 쓰는 것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현상이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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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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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멀티데믹의 등장, 코로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코로나 발병 이후 어느새 만 3년이 돼 간다. 워낙 세계적 여파가 큰 사건이었기에, 그리고 우리 삶을 폭력적으로 뒤바꾼 현상이기에 그간 새말모임에서도 코로나 관련 용어를 여러 차례 다루었다. 2020년 3월 ‘팬데믹’과 ‘에피데믹’을 우리말 ‘감염병 세계적 유행’과 ‘감염병 유행’으로 다듬은 이래 ‘n차 감염’을 ‘연쇄 감염, 연속 감염’으로, ‘위드 코로나 시대’를 ‘코로나 일상’으로, ‘롱 코비드’를 ‘코로나 감염 후유증’ 등으로 다듬어 선보인 바 있다. 코로나와 함께 독감과 같은 다른 전염병이 동반 유행하자 이를 일컫는 ‘트윈데믹’(twin-demic)이라는 말이 등장했고, 이 역시 새말모임에서 2020년 9월에 ‘감염병 동시 유행’이라고 다듬은 말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수족구, 급성호흡기감염증인 사람메타뉴모바이러스(HMPV),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 같은 전염병에 대한 경고가 따르며 세 가지 전염병이 동시 유행하는 ‘트리플데믹’(triple-demic)이 나타나더니만 이렇게 여러 개 전염병이 동시다발 유행하는 것을 일컫는 ‘멀티데믹’(multi-demic)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2022년 8월 처음 언론에 등장한 ‘멀티데믹’은 3개월 사이에 무려 1만 2000번이 넘게 인용되는 등 만만찮은 기세로 유포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새말모임은 또다시 고민에 빠지게 됐다. 기존에 ‘트윈데믹’의 대체어로 발표한 ‘감염병 동시 유행’이라는 다듬은 말이 사실상 ‘멀티데믹’을 대신해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조어가 나왔으니 따로 다듬어야 할까 아니면 ‘감염병 동시 유행’을 이 용어에도 적용해 함께 쓰도록 할까 고민되는 지점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두 가지 전염병 유행을 가리키는 ‘트윈데믹’과 여기에 하나 이상의 질병이 덧붙여진 세 가지 이상 전염병의 발병을 뜻하는 ‘멀티데믹’은 분명 포괄하는 범위가 다른 용어다.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를 보아도 응답자의 75.9%가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게 좋다고 응답한 만큼 별도의 새말을 다듬어 선보일 필요가 있겠다. ‘멀티데믹’은 영어권에서도 흔히 쓰는 용어지만 ‘멀티플 팬데믹’(multiple pandemic)이 온전한 표현이다. 그중 ‘(팬)데믹’에 대한 대체어는 이미 ‘감염병 (세계적) 유행’으로 마련돼 있는 터, ‘멀티’를 적절한 말로 다듬으면 된다. 접두어 ‘멀티’는 어떤 말을 수식하는가에 따라 ‘많은, 여러, 다중의, 복수의, 다양한, 곱절의’ 등 우리말로 바꿀 수 있다. 이전에 국립국어원에서 순화한 사례를 보아도 ‘멀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다듬어졌는데,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복합 상영관’으로, ‘멀티커리어리즘’(multi-careerism)은 ‘겸업 현상’으로, ‘멀티페르소나’(multi-persona)는 ‘다면(적) 자아’로 다듬었다. 새말모임에서는 이런 다양한 표현 중에서 여러 질병의 동시다발에 대한 수식으로 ‘다중’과 ‘복합’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 ‘멀티데믹’의 다듬은 말 후보로 ‘감염병 다중 유행’과 ‘감염병 복합 유행’을 제시했다.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85.4%의 지지를 얻어 ‘감염병 복합 유행’을 최종 다듬은 말로 선정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팬데믹’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과연 무엇일까. 원래 이 말 자체에는 ‘감염병’이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한다.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단어 ‘팬/판’(pan)과 ‘데믹’(demic)의 뜻은 각각 ‘모두’와 ‘사람’이다. 그러니까 ‘팬데믹’이라는 단어의 말 조각 하나하나의 뜻만 따지면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이 현재는 ‘모든 사람에게 감염 위험이 있는 유행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팬데믹’뿐만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감염병 경보 단계로 이름 붙인 ‘엔데믹’(동물에서 소수 사람에게로 감염되는 2단계 경보), ‘에피데믹’(감염이 사람 간에 급속히 확산되는 4단계)도 마찬가지다. 찾아보면 원래 ‘엔데믹’은 ‘특정 지역 고유의, 풍토적인’이라는 뜻의 수식어, ‘에피데믹’은 ‘특정 지역을 벗어나 돌아다닌다(epi-)/급속한 확산’ 등의 의미로, 전염병을 한정하는 말이 아니었던 게다. 그런데 이들도 ‘팬데믹’과 마찬가지로 전염 대상이 어디까지인지 ‘범위’를 나타내기 위한 경보 단계 이름으로 불리면서 이제는 감염병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다. ※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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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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