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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디지털 태생'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모태 디지털 세대.” 이 용어가 올라오자 새말 모임 위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었다. 모태라면 흔히 ‘모솔’이라는 줄임말로 불리는 ‘모태 솔로’의 그 모태겠지? 새말 모임 위원들도 모태라는 말을 듣자마자 ‘모솔’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그래서 웃음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모태 디지털’이라는 표현을 제안한 위원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모태 ○○라는 표현은 비속어가 아닙니다. ‘모태 신앙’이라는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어나기 전부터 습득하고 있다, 그만큼 익숙하다’는 뜻이지요.” 눈치를 챘겠지만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용어를 대체할 다듬은 말을 찾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미 디지털 기술 문화가 보편화한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들 기술문화를 터득하고 이용하는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에게도 ‘디지털 네이티브’는 낯선 표현이었다. 설문조사에서 10대와 20대 답변자 중 무려 70% 넘는 이들이 뜻을 모르겠다고 답했다. 새말 모임 위원들은 우선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바꿀 것인지부터 짚어 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다른 말로 대체하기에는 우리 사회에 너무나 깊이 정착된 단어인 데다 ‘정보화’, ‘통신’ 등의 대안어 역시 ‘디지털’이 담은 뜻을 고스란히 반영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디지털이라는 단어까지 우리말로 바꾸면 북한어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라는 농담 같은 의견도 나왔다. 그만큼 ‘억지로 바꾼 느낌’이 들 것이라는 데 공감한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은 접어 두고 ‘네이티브’를 대체할 단어 찾기에 몰두했다. ‘디지털 토박이’, ‘디지털 체화세대’, ‘디지털 원주민’ 등에, 앞서 말한 ‘모태 디지털 세대’도 제시됐다. ‘디지털 태생’이라는 말도 ‘모태 디지털’과 비슷한 의미로 추가됐다. 이들 중 ‘원주민’은 특정 지역에 먼저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선주민’의 의미가 있어 ‘날 때부터 익숙하다’는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원주민’이라고 하면 첨단 기술 용어라기에는 좀 낡고 오래된 느낌이 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때 등장한 표현이 ‘디지털 원어민’이었다.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 즉 ‘원어민’은 날 때부터 특정 언어를 배우고 익혀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를 뜻한다. ‘디지털 원어민’이라고 하면 이렇게 모국어를 구사하듯 자유롭게 디지털 기술문화를 이용하는 이들을 가리키기에 맞춤한 단어라는 데 의견이 모였다.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 이렇게 해서 ‘디지털 원어민’을 1순위로, ‘모태 디지털’, ‘디지털 태생’을 각각 2, 3순위 후보로 꼽았다. ‘디지털 토박이’도 4순위로 곁들이고.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위원들은 ‘디지털 원어민’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이 가장 선호한 표현은 ‘디지털 태생’이었다. 새말 모임 위원들이 3순위로 꼽았던 표현인데 말이다. 하지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여론조사에서 ‘디지털 태생’도 그다지 큰 지지는 받지 못했다. 고작 55%의 답변자가 “적절하다”고 답했다. 이 수치는 다른 다듬은 말 후보 중에서 지지도가 낮은 편에 속한다. 일반 국민 여론조사에서 ‘디지털 세대’라는 대안이 많이 나오긴 했으나, 디지털 세대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컴퓨터를 다루기 시작한 세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즉 40대나 심지어 50대에서도 자신을 ‘디지털 세대’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비해 요즘 사용되는 ‘디지털 네이티브’는 태어날 때부터 거의 모든 것이 디지털이었던 순정 디지털 세대이므로 새말 모임에서도 차별성을 부각하려 고민한 것이리라. ※ ‘새말모임’이란 어려운 외래 용어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의 분야로 구성된 위원회를 말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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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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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환경·사회·투명 경영’과 ‘이에스지(ESG) 경영’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새로 들어온 외국어 표현 중에서도 영어 단어의 각 뜻을 알면 어렴풋하게라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 있다. 하지만 영어 단어의 알파벳 앞자리를 따서 만든 약어의 경우 각각의 알파벳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요즘 언론에서 흔히 접하는 ‘이에스지(ESG) 경영’이 대표적인 예다. ‘ESG’란 ‘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의 머리말을 모은 것으로, 이에스지(ESG) 경영은 환경 보호와 사회적 기여도를 고려하고 법과 윤리를 준수하며 지배구조를 개선하고자 하는 경영 철학을 일컫는다. 국립국어원에서 꾸린 새말모임 위원들 사이에서 이 말을 다듬는 것에 논란이 있었다. “경영계에서 브랜드처럼 굳어진 용어라서 다듬은 말을 내놓아도 사용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이미 괄호 안에 우리말로 풀어서 설명을 써 주는 방식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데, 다듬은 말을 마련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위원들은 결국 “어려운 개념어인 만큼 더더욱 우리말로 풀어낸 대체어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물론 이전에도 시에스알(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시에스브이(CSV·공유가치창출)처럼 우리말로 풀어 쓰지 않고 통용된 경영 관련 약어가 더러 있었지만, 이에스지는 그것들보다 우리 삶에 훨씬 많이 노출돼 가는 추세이고,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 가야 할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월 7일부터 12일까지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설문 대상자 2000명 중 무려 38.8%가 “ESG 경영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 보았다”고 답했고, 33.9%는 “들어 본 적은 있지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여기에 62.1%의 응답자가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었다. 그렇다. 쉽게 풀어 쓴 우리말이 꼭 필요한 단어였다. 다듬은 말 후보는 두 가지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첫 번째는 영어 단어의 뜻을 그대로 번역해 옮겨 만든 ‘환경·사회·지배구조 개선 경영’이다. 괄호 안에 약자로 ‘환사지 경영’이라고 병기하는 방안도 제안됐다. 너무 설명적이고 길다는 의견이 나오자 지배구조 뒤에 ‘개선’이라는 글자를 뺄까도 논의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지배구조 경영’이라고 하면 지배구조를 ‘어떻게’ 하자는 의미인지 불분명해지므로 ‘개선’을 넣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는 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일대일 번역하는 대신 좀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쓰거나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라는 단어는 ‘사회 공헌’으로 바꾸어 그 의미를 더 선명하게 표현하고, ‘지배구조 경영’ 대신 ‘책임 경영’, ‘투명 경영’, ‘윤리 경영’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이런저런 조합을 해본 끝에 최종적으로는 ‘환경·사회·투명 경영’이라는 표현으로 다듬었다. 이들 1, 2안을 선택지로 설문조사해 보니 국민들은 두 번째 방안, 즉 ‘환경·사회·투명 경영’에 더 많은 표를 던져 주었다. 응답자의 86.6%가 ‘적절한 표현’이라고 호응한 것이다. 실은 단어의 원뜻을 되도록 변형시키지 않고 다듬은 말로 옮기고자 ‘환경·사회·지배구조 개선 경영’(환사지 경영)을 1순위 후보로 꼽은 새말모임 위원들의 선택과는 다른 결과다. 원뜻을 얼마나 ‘직역’해야 하는가, 과감한 삭제와 변용을 더한 ‘의역’이 필요한가? 다듬은 말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이번에는 국민들이 후자의 손을 번쩍 들어 주었다. ※ ‘새말모임’이란 어려운 외래 새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통번역, 문학, 정보통신, 보건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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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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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선영(이화여자고등학교 독일어·영어 교사) 어느 주말 지방에 가려고 기차를 탔는데 입석으로 서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뿐인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어르신들은 차표를 예매하는 앱을 스마트폰에 설치하거나 온라인으로 결제하는 방법을 잘 모르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를 부르는 앱을 사용할 줄 몰라서 길 한복판에서 한없이 예약 표시등이 켜져 있는 택시들을 지나쳐 보내고 망연자실하거나, 급기야 외출이 두렵다고 주변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도 했다. 엊그제 과메기를 드시고 싶다는 아버지 말씀에 어머니께서 불편한 다리로 과메기를 사러 대형 슈퍼마켓에 다녀오셨다기에, 놀라서 다음날 바로 인터넷으로 새벽 배송되는 과메기를 친정집 문 앞으로 보내드렸다. 쉰 살이 넘으면서 드는 생각은 두려움이 커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 급변하는 정보나 기능으로부터의 소외, 무기력감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현역으로 일하는 동안은 학생들과 교류하고 젊은 동료들과 소통하는 덕분에, 또 일로 인한 압박 때문에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어느 정도 나를 현재에 맞게 살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10년 후 은퇴하고 나면? 지금은 아무리 날고 기더라도 어느 날 늙은 몸을 이끌고 길 한복판에 망연자실해서 서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정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존감을 지켜 주고 사회에서 자신이 위치한 좌표를 깨닫게 해주며,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고 더불어 필요한 것을 찾아 공급받아 편리함을 누리게 해주는 삶의 주요 재료이다. 정보라는 재료로 주변 이들과 소통하고 내 처지를 이해시키고 남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기본적인 소통의 재료인 정보를 접할 길이 없다면, 혹은 특정 정보를 몰라서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어려워서 위축된다면 어떠할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독일 공항에서 입국했던 경험담을 말씀하신다. 대부분 입국심사대에 있는 독일 경찰이 무섭다는 이야기였다. 덩치도 크고 인상도 무섭고 표정도 험악하다고 한다. 독일에 일과 여행으로 방문할 기회가 많은 나로서는 좀 의아하다. 독일 방문이 잦은 내 여권을 보면, 그 무뚝뚝해 보이는 독일 경찰의 질문이 갑자기 쏟아진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독일어는 어디서 배웠어요? 학생들은 독일어를 왜 배워요? 독일어 배워서 무슨 일을 한국에서 할 수 있나요? 독일 도시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아요? 등등 미소까지 지으며 온갖 질문을 해댄다. 독일 경찰의 다소 엉뚱하기까지 한 질문 세례는 독일어를 구사하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만한 경험이다. 같은 언어를 한다는 것,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빗장을 여는 것과 같다. 같은 언어 사용자로서 쉽게 소통하며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전제만으로 두려움이 사라진다. 내 주변 사람들은 유럽에서 프랑스를 최고의 여행지로 손꼽곤 하는데, 프랑스어로 소통할 줄 모르는 나로서는 프랑스는 그저 두려운 곳이다. 글에 담긴 정보도 읽을 수 없고 의사소통에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유럽에 가면 독일에 있을 때 그저 마음이 편안하다. 독일어로 정보를 이해할 수 있고 독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1. 독일어가 꽃피는 계기를 만든 그림 형제 그런데 독일 사람들에게도 과거 독일어가 박대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지식인 소수의 전유물인 라틴어 대신 천시받던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본격적으로 독일어로 쓴 책이 읽히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어가 제대로 꽃피게 된 계기를 만든 이들은 바로 그림 형제(Gebrüder Grimm)이다. 형 야코프 그림(Jakob Grimm)은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언어학자로, 동생과 함께 게르만 민속 중에서 동화를 찾아내어 「어린이와 가정의 동화」를 집대성하였다. 입으로 전해지던 설화를 기록문학의 형태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림 형제의 동화가 두루 읽히면서 본격적으로 독일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들 형제의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은 1852년에 시작하여 8년에 걸쳐 집필한 「독일어 대사전」이다. 이는 이후 언어학자들에 의해 1세기 이상이 걸려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그림 형제의 노력이 없었다면 독일어가 지금의 위치에 있을 수 있을까. 한글은 그간 총 세 번 천시 당한 것 같다. 첫 번째로, 여성, 평민들이나 쓰는 언문이라며 조선 시대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천시당했고, 두 번째로, 일제 강점기에 침략 정부에 핍박당했고,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요즈음이다. 요새는 얼핏 보면 한글인데 우리말이 아닌 것이 지나치게 많다. 심지어 영어를 섞은 줄임말까지 넘쳐난다. 영어 선생인 나조차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확인차 다시 읽어보게 되는 표현이 셀 수 없이 많다. 영어권에 살아본 적이 없거나 영어를 오래 배우지 않은 분들은 어떻게 이해할까. 영어에 자주 노출된 세대는 상대적으로 10대 포함 2030 젊은 세대이다.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어린 시절에 영어학원에 오래 다녔고, 영어 공부해서 대학에 갔고, 어학연수도 유학도 다녀와서 해외 경험도 많이 하다 보니 영어에, 읽는 소리를 달아놓은 각종 표현 등에 큰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요새는 진보를 자처하는 논객들도 ‘워딩(WORDING)’같은 표현을 수시로 사용한다. 광고는 장삿속으로 어쩌면 젊은 특정 계층만을 겨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교육청 포함 각종 관공서 안내문에 한글의 ‘껍질만 이용한’ 표현이 나오면 의아하다. 우리말 표현이 있지만 영어를 사용해서 색다르게 이목을 끌고 싶은 것인가. 하지만 그러한 표현들이 자주 사용되어 아예 우리말 표현을 없애는 원동력이 되어버린다면? 처음에는 어쩌면 자기들끼리만 아는 특별한 계층의 암호처럼 영어를 쓰고 ‘아는 사람만 사용해’라고 일부러 제한을 둔 지도 모르겠다. 의도대로 된 것일까. 보이지 않는 차별은 여전히 늘어만 간다. ‘라떼’인 기성세대가 갑질을 한다고 하지만, 라떼들은 젊은 세대들이 하는 말과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 소외된다. 공정성과 형평성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어와 그 표현에서 풍기는 미묘한 차별을 영영 두고 볼까. 차별의 의도가 없더라도 사용되는 표현이 잠정적으로 누군가에게 위화감을 준다면 그 표현의 사용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 사회에 누군가는 내가 무심코 사용한 말귀와 글귀를 이해하지 못해서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지 모른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세종대왕께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라며 한글 창제 이유를 분명히 밝혀놓으셨다. ‘서르 사맛디’가 정보의 이해도와 의사소통에 글자와 말이 함께 가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림 2. 한글의 껍질만 이용한 말이 너무 많다. 요새 나는 원하지 않아도 부쩍 반문하게 된다. 말귀를 못 알아먹어서이다. 지난주에도 학교의 젊은 동료 선생이 우연히 하소연하는 말을 듣고 부득이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지금은 당장 마통부터 만들어야 해요...” “네? 뭐라구요? 마통?” “아... 마이너스 통장이요.” 반문도 한두 번이지 못 알아듣는 횟수가 늘어나니 자꾸 주눅이 들게 된다. 앞으로 퇴직까지 10년을 젊은 세대와 같이 잘 소통하며 일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생긴다. 아직 잘 버티고 있지만 20년 후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아예 길 위에 서서 어안이 벙벙하거나 아예 말귀도 못 알아듣고 글귀도 이해 못 해서 위축되어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강제 ‘히키코모리’가 될지도 모른다. 이선영(교사) 이화여자고등학교 독일어·영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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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선영
- 등록일 : 202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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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에서 ‘누리집’으로 바뀌고 있다.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대표 민주사회에서 언어 순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언어자유주의자 지식인들의 생각과 달리 말은 바뀌고 있다. ‘네티즌’이 ‘누리꾼’으로 바뀌는 추세는 매우 확고해졌고, 최근에는 ‘홈페이지, 웹사이트’가 ‘누리집’으로 바뀌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리집’이라고 말하면서 그 주소를 알려주려면 나도 약간 손끝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방송이든 코로나 예방접종 예약을 하거나 정보를 확인하려면 ‘코로나19 예방접종 누리집’으로 가라고 안내한다. 소상공인 방역지원금을 신청할 때도 “안내 문자를 받은 소상공인은 전용 누리집인 ‘소상공인방역지원금’에서 신청할 수 있다.”고 방송마다 말한다. 내 기억으로 네티즌이 누리꾼으로 바뀌는 데에는 아나운서 한 분의 선도적인 실천이 큰 몫을 하였는데, 누리집은 사정이 좀 다르다. 어느 방송에서나 기자들이 다 그렇게 안내하고 있다. 이 기자들이 뭔가 결탁이라도 했을까? 그럴 리 없다. 이들이 참고하고 있는 정부 보도자료에서 ‘누리집’이라고 안내하고 있어서 기자들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도자료를 작성한 정부 관계자들은 왜 누리집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우리나라 초등 교과서에 ‘누리집’이라는 말이 실려 있어서 그러할까? 그냥은 고쳐지지 않는다. 역시 사람의 외침과 실천이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우리 한글문화연대에서 운영하는 ‘쉬운 우리말을 쓰자’ 누리집에서는 정부의 외국어 남용 때문에 불편해하는 국민의 제보를 받고 있다. 거기에 정부 부처 및 지자체가 사용하는 ‘홈페이지’와 ‘웹사이트’라는 말을 고쳐 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그에 따라 한글문화연대에서 해당 기관에 바꿔 달라는 공문을 끈질기게 보냈다. 생각보다 요청이 잘 먹혔다. 2020년 10월에 전남도청, 2021년 3월에 여성가족부와 문화재청, 통계청, 기상청, 법제처, 강원도교육청, 산업통상자원부, 인천광역시, 한국어촌어항공단, 감사원, 경기도교육청, 2021년 8월에 행정안전부 정부24, 2021년 10월에 질병관리청, 한국교육학술정보원, 12월에 정읍시 등 16곳의 공공기관에서 ‘누리집’으로 고쳤다는 답을 보내왔다. 그렇게 바뀐 곳들이 이제 어울림 효과를 내고 있다. 여기저기서 누리집이라는 말을 쓰니까 그런 개선 권고를 받지 않은 곳에서도 자진하여 누리집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따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국토교통부의 국어책임관 한 분의 노력으로 국토부의 모든 보도자료에서는 홈페이지 대신 누리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세가 형성되니 그 뒤로는 가속도가 붙는다. 고쳐지지 않는다고 팔짱 낀 채 평론하는 지식인이야 고쳐보자고 말하지 않으니 고쳐지지 않을 테지만, 바꿔 달라고 딱 집어서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둘 바꾸는 곳이 나온다. 대체로 외국말 가져다 그대로 쓰는 일은 지식인들이 벌이는 일이라 그런지 신종 외국말이 책임감 없는 지식인들 위주로 너무나 빠르게 퍼진다. 그들이 언론의 말길을 장악하고 공무원의 입을 장악해버린다. 부스터 샷, 위드 코로나 다 마찬가지다. 그런 외국어 사용하지 말자고 한글문화연대에서 말리거나 비판하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아냥댄다. 자기는 바꾸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바꾸지 않는 일은 뭘 하는 게 아니므로 쉽다. 바꾸는 일은 뭔가를 권하고 밀당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 (* 여기서 ‘지식인’이라 함은 교수, 박사급 정도는 되는 사람들이니, 그저 신종 외국말 따라 한다고 지식인인 줄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림 1. 전라남도의 '대표홈페이지' 표기가 '대표 누리집'으로 바뀌었다. 그림 2. 행정안전부 정부24의 '운영사이트' 표기가 '운영누리집'으로 바뀌었다. 그림 3. 질병청의 '사업별 홈페이지' 표기가 '사업별 누리집'으로 바뀌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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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건범
- 등록일 : 202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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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스크가 뭐예요? 이미향(영남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눈을 뜨면 새로운 기계가 나타나는 세상이다. 전자 장비가 발달하면서 사람을 대신하여 일하는 기계가 더욱 늘었다. 기차역이나 식당, 전시장 등지에 사람인 양 이용자를 맞이하는 기계가 있다. 사람을 통하지 않고 표를 사거나 주문하는 이것을 흔히 키오스크(kiosk)라고 부른다. 최신 장비는 아니나 전염병의 확산세 가운데 비대면 접촉이 선호되면서 사용량이 급성장한 기기 중 하나이다. 그림 1. 대면 접촉을 줄이기 위해 활용하는 키오스크. 주로 무인 ○○기로 바꿔쓸 수 있다. 우리는 키오스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을 이르는 말인지, 어디에서 온 말인지는 잘 생각해 보지 않는다. 여러 사전을 찾아보면 ‘공공장소에 설치된 무인 정보 단말기’라고 공통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터치스크린 방식을 사용’한다거나 ‘정보·통신 키오스크 단말을 이용’한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다. 그렇다. 무인 안내기 중에서도 터치스크린을 사용하는 신문물을 부를 때 우리는 특별히 키오스크라고 한다. 이 말이 매우 낯설지만 마땅히 대체할 이름이 없다. 사전에서조차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휘의 보물 창고라는 사전이 아직 감당해 내지 못한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키오스크라는 이름을 도마 위에 올려보자. 키오스크는 설치된 장소에 따라 하는 일이 다양하다. 기기의 기능에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표를 팔면 무인 발권기, 물건을 팔면 무인 판매기, 정보를 안내하면 무인 안내기와 같이 써도 문제가 없어 보인다. 100년 전과 모양이 바뀌어도 모자는 여전히 모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익숙한 말이 새로운 대상을 충분히 지시할 수 있다. 새로운 문물에는 꼭 기발한 새말을 만들어 붙여야만 하는가? 신기술이 들어간 문물을 유독 외국어로 부르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키오스크(kiosk, kiosque)는 궁전을 이르는 페르시아어 ‘쿠슈크(kushk)’에서 유래되었다. 그 흔적이 남은 터키어 ‘쾨슈크(köşk)’는 작은 여름용 별장 또는 정원에 건축된 작은 누각을 이른다. 이후 키오스크는 그러한 모양으로 지은 간이 건축물을 이르게 된다. 20세기 초, 사람이 잘 모이는 길목이나 광장에 앞면이 열린 작은 가게들이 문을 열고 신문이나 잡지를 팔았는데, 이러한 간이 건축물을 키오스크와 닮은꼴로 여긴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키오스크는 한 번 더 의미를 갈아입는다. 정보화 사회의 기세를 타고, 사람 없이 정보를 제공하거나 업무를 자동으로 수행하는 기계를 부르는 말이 된 것이다. 그림 2. 20세기 초부터 간이 건축물에 설치한 상점을 키오스크라고 불렀다. 키오스크는 여전히 유동 인구가 많고 개방된 장소에 설치된다. 상품 정보와 시설물을 안내하는 동시에 광고도 하려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키오스크를 설명한 어떤 사전에든 ‘대중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이라는 설명이 함께 등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키오스크가 공공성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것은 주로 식당, 버스터미널, 지하철, 관공서 등 공공장소에 설치된다. 그러면 과연 키오스크는 대중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가? 공공장소에 세워둬도 될 만큼 대중의 공익에 이바지하고 있는가? 키오스크에는 온갖 외국어가 도배되어 있다. 셀프 오더, 테이크 아웃, 솔드 아웃, 사이즈 업, 더블샷, 사이드와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 온통 외국어로 적혀 있는데도 항의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더욱 놀랍다. 최신 문물은 응당 외국어로 되어 있다는 뜻인지, 이용에 서툰 사람으로 보이기 싫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기계 앞에서 헤매는 사람은 굳이 연로한 분들만이 아니다. 분야가 조금만 달라지면 누구든지 소외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개발되는 키오스크가 유독 비용 절감에 집중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비용상 일어나는 문제 이외의 것은 문제로 여기지 않고, 그저 감내할 불편 정도로 여기고 만다. 사회 분열과 세대 간 소통 단절은 이런 틈을 비집고 들어앉는다. 공공이란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어떤 이는 정보를 소유할 권리를 두 배로 가지고, 어떤 이는 정보를 얻지 못해도 되는가? 신문 기사를 보니, 요즘 어르신들은 키오스크 사용법을 익히는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같은 버튼을 여러 번 누르다가 햄버거 8개를 받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실려 있었다. 그런데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실습용 키오스크, 키오스크 활용 수업, 키오스크 디자인’과 같이, 하소연을 하는데도 여전히 키오스크라는 말이 쓰이기 때문이다. 통합과 소통을 외치는 시대이다. 소수가 알아듣는 말은 옹알이에 불과하다. 한국의 정보 통신 기술이 세계 최고라는데, 전자 장비에 한국말이 들어갈 수는 없는가? 공공성이 깃든 좋은 말을 고민하다 보면, 현명한 언중이 사전의 빈칸을 메워 내는 날이 올 것이다. 이미향(영남대학교 교수) 영남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한국일보 사설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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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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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소준섭
- 등록일 : 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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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에 ‘센터’를 선호하는 숨은 이유가 있다? 최보기(작가, 서평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특별한 기능을 담당할 신규 조직이나 공간을 마련할 때 반드시 해야 할 업무 중 하나가 거기에 해당하는 명칭을 정하는 것이다. 대부분 명칭은 담당 주무관이 자의적으로 짓지 않고 이해가 걸린 주민을 대상으로 공모, 선호도 조사 등 공개 과정과 최종 결재권자의 낙점을 거쳐 결정된다. 그래야 주민, 의회 의원 등이 “명칭을 왜 그렇게 지었느냐?”라고 따지더라도 ‘주민 여론을 수렴한 결과’임을 들어 비난이나 책임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주민 공모, 선호도 수렴을 거친 결과를 보면 우연이겠지만 이상하게 ‘센터’가 많이 선정된다. 자원봉사센터, 데이케어센터, 장애인복지센터, 모자보호센터, 위기가정구호센터, 청소년자치센터 등등이 모두 그렇다. 조직이 방대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한 기능을 담당할 경우 센터가 가장 흔하게 쓰이고 있어 익숙하고 무난한 이유도 있겠지만 필자 생각에는 전혀 엉뚱한 이유도 하나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 1. 해당 공간 운영 책임을 맡을 인력 중 최고 책임자 호칭은 공간 이름을 따라가는 것이 관행이다. 가령 남산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보호하고, 관광객에게 그것들을 알릴 목적으로 남산 자락에 서울시가 조그만 건물을 새로 마련해 민간단체에게 운영을 위탁할 경우 건물 명칭은 대개 ‘남산식물전시관, 남산식물연구원, 남산식물보호소, 남산식물알림터, 남산식물센터’ 같은 고만고만한 이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해당 공간 운영 책임을 맡을 인력 중 최고 책임자 호칭은 공간 이름을 따라가는 것이 관행이므로 ‘관장, 원장, 소장, 센터장, 터장’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관장, 원장, 소장’은 주무관이 편히 다루기에는 어감이 좀 높은(?) 사람이다. ‘센터장’은 상대적으로 다루기 편한 어감이고, ‘터장’이란 호칭은 쓰이지 않는다. 지방자치단체마다 ‘000센터’가 많은 것이 아마도 이런 연유도 한몫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사실은 몇 번의 명칭 선정 과정에 관여했던 필자의 개인적 촉이자 느낌일 뿐 과학적 연구나 면담 결과가 아니므로 엉터리 주장일 수도 있음을 양해 바란다. 센터와 비슷한 입장에 있는 직위 호칭으로 ‘매니저’가 있다. 대개 센터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공간인데 명칭에 센터가 붙지 않았을 때, 해당 공간의 운영과 관리를 총괄하는 책임자에게 ‘매니저’라는 호칭이 애용된다. 매니저는 ‘관리인, 관리자’인데 ‘관리인’은 ‘건물 관리인’ 정도 어감이라 콘텐츠(?)가 빈약하고, ‘관리자’는 너무 일반적이라 호칭으로 적당치 않다. ‘매니저’라고 부르면 그나마 좀 있어 보인다. 만약 ‘데이케어센터’ 대신 ‘주야간보호터’라는 명칭으로 변경을 검토할 경우 해당 공간 책임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부터가 어려운 결정이라 기각될 확률이 높고, 변경이 된다면 책임자는 필시 ‘터장’ 대신 ‘매니저’라고 불릴 확률이 높다. 공공기관에서 쉬운 우리말 대신 어려운 외국어를 굳이 쓰는 데는 마땅한 대체어가 없거나 왠지 외국어를 써야 주민 호감도가 높아질 것 같은 언어 사대주의 말고도 ‘담당 주무관의 기분이나 자존감’ 같은, 생각지 못할 엉뚱한 이유들도 있다고 필자는 강하게 의심하는 것이다. 최보기(작가, 서평가) 관악구청 청년정책과 구로구청 구정연구관 ‘최보기의 책보기’ 연재 서평가 저서 『거금도 연가』 『놓치기 아까운 젊은 날의 책들』 『박사성이 죽었다』 『독한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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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최보기
- 등록일 : 202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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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줄임말, 암호와의 전쟁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대표 소확행. 여러 번 들었음에도 주의 깊게 듣지 않아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말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해보지 않은 음식을 만들어 가족의 품평을 들어가며 함께 저녁을 먹는 풍경이라면 코로나 시국이든 아니든 ‘소확행’이라고 할 만하다. 바쁜 일상에서 짬을 내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젊은 날부터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면 이건 내게 ‘소확행’임에 분명하다. 처음엔 너무 낯설어서 당혹스럽더라도 줄임말의 뜻과 용법에 익숙해진다면 마치 하나의 새로운 어휘를 얻는 기분이 들 수 있다. 줄임말은 이런 강점이 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직접 사용해 보고 싶어진다. 그런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 말들은 생명력이 긴 법이니, 밀당, 꿀잼, 가성비 같은 새 줄임말들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우리의 말 줄이기는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전경련’으로 줄이는 식의 한자어 위주 문화였는데, 21세기 들어서는 일상의 토박이말에서도 과감하게 어근만 떼어내거나 앞대가리 말만 떼어내 말을 줄여가는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즐감, 내로남불 등이 그런 사례이다. 새로운 느낌이나 문화, 사회 현상, 개념, 기술, 이론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말이 필요한데, 완전히 낯선 새말보다는 기존의 말을 묶어 복합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방법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들은 길어지기 쉬우니 앞머리만 끌어내어 줄이는 게 가장 초보적인 새말 만들기 방법일 터이다. 달리기를 하며 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일이라는 뜻의 ‘플로깅’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쓰레기 주워 담으며 달리기’로, 이걸 줄여서 ‘쓰담 달리기’로 줄인 것이 하나의 사례이다. 외국어 사용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간단하게 ‘줍다+조깅’의 방식으로 ‘줍깅’을 쓰기도 한다. ‘쓰담 달리기’도 ‘쓰담달’로 더 줄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말 줄이기는 경제성이라는 명분, 아니 실리가 작동하여 벌어진다. 지면에 길게 쓸 공간이 없으니 줄인다, 말을 길게 할 시간 여유가 없으니 줄인다, 길게 말하고 쓰려면 힘이 드니 줄인다, 생각의 진행에서 방해받지 않으려면 덕지덕지 늘어지는 말보다는 날씬한 말이 편하니 줄인다, 문자 위주의 대화 환경이 득세하니 길게 쓰기 힘들어서 줄인다. 모두 납득할 만한 사연이다. 물론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거나 그 줄임말을 접해보지 못했던 다른 동네 사람들이 처음에 당황하고 대화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오해와 혼란이 생길 수 있기에 이런 줄임말은 공식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특히 국민의 안전과 재산, 권리와 의무, 기회와 행복을 다루는 공공언어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도입해야 한다. 우리말 줄임말이 비교적 생활문화 속 유행에 따른 일상어가 많다면, 로마자 줄임말은 사태가 좀 다르다. 요즘 텔레비전 뉴스에 자주 들리는 말이 오티티(OTT)이다. 넷플릭스와 드라마 ‘오징어 게임’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전통적인 텔레비전 송출―방영권 계약―타국과 타 지역 텔레비전 가입자에 대한 제한적 송출 등 과거의 드라마 유통 수출입 방식과는 다른 인터넷을 이용한 전 세계적 송출을 뜻하는 말처럼 들리긴 했다. 그런데 이놈의 말이 도무지 추정이 쉽지 않았다. ‘on the ...’에 ‘tv, table, target, tablet ?’ 아무리 생각해도 뜻과 구성이 닿지 않는 말이었다. 정답은 ‘over the top’이란다. 이때의 ‘top’은 셋톱(settop)의 톱에서 따온 것이란다. 아마도 셋톱 장치를 통해 제공하는 것으로 한정된 서비스를 넘어선다는 뜻인가 보다. 외국어를 철자 대가리만 떼어내서 짧은 용어처럼 줄여 쓰거나 부르는 방법은 이미 외국에서 많이 써왔다. 기업 이름으로서는 IBM이 낯익고, 국제기구로는 UN, OECD, WTO, WHO가 매우 낯익으며, IMF, FDA, NASA와 같은 기관들도 그렇다. 이런 조직 이름 말고는 주로 정보통신 분야에서 새로 등장하는 기술과 현상 이름에 로마자 줄임말을 가장 많이 쓴다. 새로운 기술과 영역과 흐름의 융복합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SW, HW, PC, DOS, TFT LCD, TCP/IP, HTML, SNS, AI, VR, AR 등 셀 수도 없이 많다. 물론 정보통신 분야의 문제만은 아니다. 업무 관련한 활동을 가리키는 말 가운데에도 로마자 줄임말이 제법 쓰인다. 연구개발을 뜻하는 R&D, 전담 조직을 뜻하는 TF, 업무협약을 뜻하는 MOU 등이 대표적인 말이다. 사업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 지식 재산권은 IP, 기업 투자설명회는 IR, 창업투자사는 VC로 부른다. 언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중앙정부와 지자체 공무원들이 보도자료 등의 공문서에서 이런 말들을 우리말로 바꾸어 적지 않고 로마자 그대로 적어버리면 사실은 실정법인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항을 위반하는 일이다. 법 조항은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 등을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정하였다. 여기서 ‘한글’이라는 문자로 작성하여야 한다는 뜻은 로마자나 한자로 적지 말라는 말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규정이다. 물론 법에서는 예외를 생각하여 꼭 필요한 경우엔 괄호 속에 한자나 외국 글자를 병기할 수 있게 허용한다. 그러니 괄호 속에 적지 않고 본문에 그냥 적은 로마자는 국어기본법 위반 요소인 것이다. 공무원들이 작성한 보도자료에서 한자나 외국 글자를 본문에 그대로 쓰면 언론에서도 그대로 나가기 쉽다. 특히나 신문의 제목 공간과 텔레비전의 자막 공간은 좁기 때문에 로마자 줄임말 좀 쓰면 어떠냐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문자 사용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로, 앞의 오티티 사례에서 보았듯이 로마자 줄임말만으로는 전체 뜻 구성을 추정하기 어렵다. 비슷하게 모호하여 답답한 사례가 ‘ASF’라는 줄임말인데, 이건 아프리카돼지열병을 가리킨다. 신문 제목에서 자주 보는 이 말을 일반 국민 97%가 어렵거나 전혀 모르겠다고 한다. 2021년에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티앤오 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27.7%는 ASF를 전혀 모른다고 했고, 70%는 어렵다고 응답했다. 둘째로, 철자는 동일한데 원어가 다른 말들이 계속 생겨난다. 대표적인 예로, ‘AI’는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과 조류 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 ‘IP’는 지식 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과 인터넷 접속 주소(Internet Protocol), ‘IC’는 나들목(Interchange)과 구동칩(Integrated Circuit), ‘PM’은 개인형 이동장치(Personal Mobility)와 사업 관리자(Project Manager) 따위로 헷갈리는 경우가 생긴다. 로마자 줄임말을 정부 공무원들과 언론에서 자주 사용하다 보면 우리말에서든 외국어에서든 줄임말 사용 경향이 지나치게 강해질 위험이 있다. 이는 공공 차원의 소통에는 분명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말은 모두 우리말로 바꾸어 한글로 적도록 애써야 소통이 편해진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적기에 너무 길다면 우리말 줄이는 방식으로 과감하게 줄이는 게 그나마 로마자 줄임말보다는 의미를 추정하기에 쉽다. 예를 들어 ‘OECD’를 ‘경제협력개발기구’로 바꾸어 쓰는 게 너무 길다고 느낀다면 ‘경협기구’로 줄이라는 제안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에도 너무 길거나 말 만들기 쉽지 않다면 음을 따서 한글로 적는 방법이라도 써야 한다. 예를 들어 ‘UNESCO’는 ‘유엔교육과학문화위원회’인데, 줄이기도 마땅치 않으니 이럴 때는 로마자로 적지 말고 한글로 ‘유네스코’라고 적으라는 것이다. 공무원과 언론에서 일반 국민에게 암호와의 전쟁을 강요할 까닭이 없다. 이 글은 한국어문기자협회 소식지인 <말과 글>에 기고하였습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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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건범
- 등록일 : 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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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채용, 장애인 차별하는 말 소준섭(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국제관계학 박사) “블라인드 채용? 차별을 없애자면서 왜 차별어를 쓸까? ‘블라인드 터치’라는 말이 있다. 컴퓨터나 워드 프로세서에 키보드로 입력을 할 때 자판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손가락 끝의 감각에만 의지하여 자판을 두드리는 기법을 말한다. 그런데 영어 단어 ‘blind’는 “눈이 부자유한”이나 “눈이 보이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시각 장애인’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차별 언어’이다. 더구나 이 말은 ‘브라인도 탓치(ブラインドタッチ)라는 일본식 영어에서 온 말이다. 이러한 차별어는 당연히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림 1. ‘블라인드’는 차별어이자 일본식 영어 표현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비슷한 용법으로 ‘블라인드 채용’이란 용어를 널리 사용하고 있다. ‘블라인드 채용’은 입사지원자들이 이력서에 차별당할 수 있는 사항들을 기재하지 않은 채로 시험과 면접을 치를 수 있는 채용 방식을 뜻한다. 이러한 ‘블라인드 채용’은 우리 사회에서 ‘불공정한 차별’을 없애고 공정한 채용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널리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블라인드, blind’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차별 용어’에 속한다. 차별을 없앤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채용 방식에서 정작 ‘차별어’를 사용하는 현상은 참으로 모순적이다. 특히 공공기관에서도 ‘블라인드 채용’이라는 용어를 널리, 흔하게 사용하고 있다. 장애인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서야 할 공공기관에서 차별 용어를 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함은 마땅하다. 이렇듯 일본식 영어 남용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산업 동향 보고서에서 “미국 거대 반도체 기업들이 글로벌 플랫포머로 미래차 시장 지배 전략을 모색 중”이라고 지적했다. 플랫포머는 반도체, 소프트웨어에서의 독보적 경쟁력을 갖고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기업들을 의미한다(2021년 9월 28일). 최근에 발행된 한 언론 기사의 내용이다. 이 글에 나오는 ‘플랫포머’는 일본에서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다. 즉, ‘플랫포머, platformer’는 정보 전달이나 사업을 위한 플랫폼을 제공하는 사업자 또는 인터넷에서 대규모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대 정보통신 기업을 지칭한다. 상당한 공신력을 지닌 연구원의 보고서에서 일본식 용어를 ‘보급’하는 셈이다. 이렇게 일본식 영어 남용 현상은 단순한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진행되는 현재형이다. 프랑스 헌법 제2조, “프랑스의 언어는 프랑스어로 한다.” 프랑스어는 이 지구상에서 우아하고 고상한 언어 가운데 하나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프랑스어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프랑스 헌법 제2조에는 “프랑스의 언어는 프랑스어로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공적 영역에서 공용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도록 국민에게 강제하는 규정이다. 대중 매체를 포함한 모든 공식 문건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신조어는 언어의 규범화(codification)라는 목적으로 세워진 국가 언어정책 기구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또한 프랑스 정부는 1972년 용어 및 신조어를 관리하기 위하여 정부 각 부처에 반드시 전문용어위원회를 설치하고, 새로 유입되는 외국어에 적절한 번역용어를 지정하거나 새로 출현한 물건이나 개념을 지칭할 단어를 제정하는 등 관련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헌법 제2조, “프랑스의 언어는 프랑스어로 한다.” 언어란 한 나라의 문화를 형성하는 핵심적 구성 요소이다. 우리말을 소중히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엄중한 임무다. 소준섭 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국제관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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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소준섭
- 등록일 : 20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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