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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리커머스’가 아니라 ‘재거래’!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쓰던 물건을 사고파는 중고 거래가 요즘 활발하다. 예전에도 책이나 음반처럼 형태와 내용물이 일정한 ‘정보 상품’의 중고품 거래가 제법 있었지만, 최근 소비자들이 거래하는 품목에는 의류, 생활용품, 전자기기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다. 쓰레기를 줄이고 제품 수명을 연장해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정말 반가운 일이다. 다만 염려되는 점은 이 분야까지 불필요한 외국어가 스멀스멀 끼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살펴볼 ‘리커머스(recommerce)’라는 단어가 그 예다. ‘리커머스’의 사전상 의미는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을 재거래하는 제품 판매 전략. 새로운 상품을 살 때 기존에 사용하던 제품을 반납하면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보상 판매와 일정 기간 후 새로운 상품으로 바꿔 주는 교환 판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우리말샘>)이다. 이 말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한 <한국경제> 2011년 10월 자 기사에 따르면, ‘리커머스’는 영국의 한 기업 자문 업체가 만든 신조어로 “기업들이 경기 악화로 새 상품을 쉽게 구매하지 못하는 소비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그리고 “확산되는 기부문화와 보상판매를 연결시키기 위해” 도입한 주목받는 거래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 우리 언론에서도 심심찮게 쓰였다. “리커머스 시장 활성화에 따라 중고 거래 메신저 사업도 염두에 두고 있다.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물건을 전달해주는 게 골자다.”(<머니투데이> 2023년 2월)와 “리커머스 플랫폼은 ‘신상’ 상품과 신상의 ‘엔차 제품’을 함께 검색해 구입하는 20·30대를 중심으로 특히 인기가 높다.”(<헤럴드경제> 2022년 8월) 하지만 앞서 말했듯 중고 거래는 새로 등장한 거래 방식이 아니다. 굳이 영어를 사용해서 신규 사업처럼 지칭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리커머스’를 순화하는 작업은 사실 ‘새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원래 사용하던 우리 이름 중 가장 적절한 것을 찾아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존 우리말 다듬기 작업에서는 ‘리-커머스(re-commerce)’를 각각 어떻게 바꿨을까. 접두어 ‘re’는 반복, 복구, 순환 등을 뜻하는 말로 이전 순화 사례로 ‘리사이클링→ 재활용’, ‘리프레시→ 재충전’, ‘리셀→ 재판매’ 등이 있다. ‘커머스’의 경우, ‘모바일 커머스→ 이동 통신 거래’, ‘이커머스→ 전자상거래’로 다듬는 등 주로 ‘거래’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그러나 ‘소셜 커머스→ 공동 할인 구매’, ‘라이브 커머스→ 실시간 소통 판매’처럼 상호 거래보다 각각 구매, 판매 측면을 강조해서 순화한 경우도 있다. 현재 ‘리커머스’는 사용자가 쓰던 물건을 다른 소비자와 거래하는 ‘단순 중고 거래’, 명품이나 한정판 물품의 ‘재거래’, 기업의 ‘상품 임대’, 제조사가 기존 판매 제품을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보상 판매’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따라서 이번 다듬기 과정에서는 이 모든 뜻을 폭넓게 아우르는 표현을 찾으려고 애썼다. 자연스레 전부터 쓰던 ‘중고 거래’라는 말은 새말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여러 고민 끝에 새말 모임에서 최종적으로 골라낸 세 개의 후보 말은 ‘재거래’, ‘재거래 시장’, ‘재순환 판매’였다. 이중 여론조사에서 ‘재거래’가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재거래’가 ‘리커머스’를 대신하는 우리말로 공식 선정된 것과 발을 맞춰, 이 업계에 갈수록 늘어가는 ‘○○마켓’ 같은 이름 대신 ‘○○시장’ 혹은 ‘○○장터’ 같은 우리말 명칭이 좀 더 힘차게 새싹을 틔우길 바란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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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스몰 럭셔리, 이제는 '소소한 사치'로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경제학 용어 ‘립스틱 효과’라는 말이 있다. 경기 불황에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고급품으로, 립스틱의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서두부터 ‘립스틱’이라는 외국어를 쓰는 게 머쓱하지만, 국립국어원이 일본어 ‘구치베니’를 순화한 우리말로 입술연지/연지와 더불어 립스틱/루주를 선정한 바 있다) 이번에 살펴볼 ‘스몰 럭셔리(small luxury)’가 바로 이런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식료품, 화장품, 생활용품과 같이 비교적 작고 소소한 제품을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것으로 구매한다”라는 뜻이다. 높은 물가와 수입 감소 등으로 지갑을 쉬 열지 않는 소비자가 값비싼 자동차나 명품 가방 대신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가 높은’ 물건을 구매하며 작은 사치를 누리는 행위다. 일종의 보상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서 가끔 ‘작지만 고급스럽고 개성 있는 호텔’을 일컬을 때 썼던 이 말을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때였다. 그해 10월 8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금융위기로 미국 소비자들의 구매패턴이 가격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라며, “1달러 안팎인 사탕이나 립스틱과 같은 필 굿 팩터(Feel good factor)가 있는 스몰 럭셔리 제품의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라는 분석자료를 배포했다. 이를 여러 언론사가 기사화하면서 ‘스몰 럭셔리’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이 용어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쓰였다. 3,000원짜리 봉지라면, 10만 원이 넘는 빙수, 25만 원짜리 케이크 등 식음료 업계가 ‘스몰 럭셔리’를 내세워 고가의 상품을 판매하는가 하면, 이른바 ‘1인 세신 샵(개인 맞춤형 때밀이)’도 스몰 럭셔리라는 수식어를 붙여 광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스몰 럭셔리’라는 용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이를 대체한 우리말 표현도 적잖이 쓰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작은 사치’와 ‘소소한 사치’다. 새말 모임에서는 ‘사치’를 대신할 만한 단어로 ‘호사’도 제시했다. ‘사치’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여론조사에 부쳐보니 사용자들은 ‘호사’보다 ‘사치’를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마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고, 단어 앞에 ‘소소한’, ‘작은’이라는 표현이 붙어서 부정적인 느낌을 상쇄했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그리하여 ‘스몰 럭셔리’의 최종 우리말은 ‘소소한 사치’가 선정되었다. 한편, ‘스몰’이라는 표현이 우리 언어문화에 빠른 속도로 침범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우려스럽다.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게 ‘스몰 웨딩’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적은 비용으로 소규모 결혼식을 올려 일반인들에게 귀감이 된 것은 좋은 일이나, ‘스몰 웨딩’이라는 말까지 함께 유행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 ‘스몰 토크’, ‘스몰 비즈니스’, ‘스몰 라이선스’ 등 충분히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는 표현도 고스란히 영어로 쓰이고 있다. 이미 국립국어원에서 ‘스몰 웨딩’은 ‘작은 결혼식’으로, ‘스몰 라이선스’는 ‘소규모 인허가’로 순화해 발표했다. 이는 같은 ‘스몰’도 어감에 따라 때로는 ‘소소한’으로, 때로는 ‘작은’이나 ‘소규모’로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스몰 토크’나 ‘스몰 비즈니스’는 공식적으로 발표한 우리 말이 아직 없지만, ‘잡담’, ‘소규모 사업’ 등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러한 사례보다 더욱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스몰 토론회’나 ‘스몰 플렉스’ 같은 말이 언론에 불쑥 등장할 때다. 전자가 우리말 앞에 영어를 갖다 붙인 국적 불명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스몰’과 정 반대 뜻인 ‘플렉스(과시적 소비)’를 결합하였으니 가히 ‘어불성설’이다. 사실 ‘우리말 순화’조차 필요하지 않다. 아예 처음부터 쓰지 말아야 할 표현들이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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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오마카세와 페어링은 '주방특선'과 '맛조합'으로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최근 커피나 차와 같은 음료도 오마카세 형식으로 내는 것이 트렌드다. 티 카페를 방문하면 차를 우리는 퍼포먼스도 감상할 수 있고, 전문가가 차를 우리면서 하나 하나 큐레이팅을 해주고 차와 페어링하기 좋은 음식을 추천해준다.” 2022년에 발간된 <여성조선>의 기사 한 대목이다. 보다시피 웬만한 명사는 모두 외국어로 되어있다. 그동안 패션 용어가 외국어로 범벅되는 추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지금은 식문화마저 그런 모양새를 보인다.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강박마저 느껴진다랄까. 그런 의미로 위 문장에서도 등장한 여러 외국어 중 최근 새말 모임이 다듬어 낸 ‘오마카세’와 ‘페어링’을 살펴보자. ‘오마카세(omaka[御任]se)’란 주방장이 만드는 특선 일본 요리를 일컫는 일본어로, 주방장이 엄선한 제철 식재료로 만든 여러 가지 요리를 하나씩 손님에게 내는 상차림 형식을 가리킨다. 2002년 한 일본 음식점의 한국 진출을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일식에서만 쓰이던 이 말이 <여성조선>의 기사에서 보았듯 다른 음식이나 음료에도 마구 사용되고 있다. 한우 오마카세, 디저트 오마카세, 커피 오마카세, 티(Tea·차) 오마카세 등등. 심지어 ‘이모카세’라는 말도 생겨났다. 음식점의 나이가 지긋한 여성 주인 혹은 주방장을 친근하게 부르는 우리말 ‘이모’에 ‘오마카세’를 결합한 잡종 언어다. 음식에서만이 아니다. ‘네일(손톱 관리) 오마카세’, ‘꽃 오마카세’, ‘헤어 스타일링 오마카세’ 마저 등장했다고 한다. ‘오마카세’에 “사물의 판단이나 처리를 타인에게 맡기는 것을 공손하게 표현한 말”이라는 뜻이 있다니, 의미만 따지자면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말로 오마카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미 언론에서는 ‘맡김 차림’, ‘주방 특선’, ‘맡김 요리’ 등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 새말 모임은 ‘맡김 차림’에 가장 높은 점수를 매기고 새말 후보로 올렸다. 기왕 새말로 다듬을 바에 순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싶었으나, 여론조사에서 선택된 새말은 ‘주방 특선’이었다. 매체에서 가장 많이 쓴 말이라 대중에게 친숙하다는 점이 큰 점수를 얻은 듯하다. ‘주방 특선’에 손님이 만족하려면 좋은 재료와 요리 솜씨도 중요하겠지만, 맛의 조합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바로 살펴볼 두 번째 외국어, ‘페어링(pairing)’에 대한 이야기다. ‘페어링’은 음식 간 어울리는 짝을 맞추는 것, 혹은 전자기기 등을 서로 연결하는 것을 뜻한다. “화이트 와인에는 생선류, 레드 와인에는 육류를 곁들여 먹는 것처럼 페어링은 주로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을 선정할 때 사용되는 용어였다”(<여성신문> 2022년 8월)가 전자의 예라면, “무선 충전과 모바일 연결성을 높인 엔에프시 페어링, 애플 카플레이와 안드로이드 오토도 지원됐다”(<매일경제> 2023년 2월)는 후자의 예다. 식문화에서 ‘페어링’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된 것은 2005년 8월 <이데일리>의 한 커피 전문점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사용이 잦아지고 있어 역시 서둘러 우리말을 정착시켜야 할 용어다. 이번 새말 모임에서 ‘맛조합’, ‘맞조합’, ‘꿀조합’으로 세 후보를 다듬어 냈다. 이 중 ‘맛조합’은 “‘전참시’ 홍현희, 팬케이크에 김치 싸 먹는 파격 맛조합”(<한국경제> 2019년 12월) “돔베고기와 멜조림을 함께 싸서 먹어본 그(백종원)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동적인 맛조합에 눈물을 훔친다”(<매일경제> 2021년 4월) 등의 기사에서 보이듯 기존에도 적잖이 사용되어 온 익숙한 표현이다. 여론조사에서도 역시 ‘맛조합’이 언중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았고, 그 결과 새말로 선정되었다. 다만, ‘페어링’이 음식이나 음료에 쓰일 때는 ‘맛조합’이 맞춤이지만, 전자기기 관련 용어로는 어색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새말 후보의 하나로 떠올랐던 ‘맞조합’으로 사용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그러다 요즘 음식점이 아닌데도 무엇이든 잘하는 곳을 일컬어 ‘맛집’이라고 하는데, 확장해서 전자기기에서도 ‘맛조합’을 써볼 수 있으려나 상상도 해본다. 두 말은 발음이 비슷하니.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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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아트 테크'말고 '예술품 투자'하자!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오늘의 신조어 ‘아트 테크(art tech)’의 뜻을 살펴보려면 먼저 ‘재테크’라는 단어부터 설명해야 하겠다. ‘아트 테크’의 풀이말에 ‘재테크’라는 표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트 테크’는 예술 작품을 재테크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 주로 작품을 구입한 후 되팔아 이익을 남기거나 저작권으로 수익을 올린다(출처: 우리말샘).” 즉, ‘아트 테크’의 어원이나 구성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 말이 곧 ‘재테크’인 것이다. ‘재테크’란 용어는 1986년 처음으로 우리 언론에 등장했다. <동아일보>가 일본 기업의 자산 늘리기 전략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재(財)테크란 일본 특유의 조어...(중략) 재무전략에 대한 테크놀로지를 줄인 말인데 쉽게 풀이하면 재산을 늘리는 테크닉”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이렇듯 처음에는 기업의 자산증식 기술, 그것도 주로 일본 기업에 국한해서 쓰인 말이었다. 그런데 점차 일반 가정에서 재산 불리는 방법을 일컫는 용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표준국어대사전에까지 올랐다. 그 이후, ‘재테크’도 아닌 ‘테크’만 붙여 특정 분야의 자산 관리나 투자 방법을 설명하는 말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집테크, 주(住)테크(집이나 부동산을 이용한 재테크)’, ‘주얼리테크(보석 투자)’, ‘금 테크(금 투자)’ 등이 그것이다. ‘아트 테크’도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아트 테크’라는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2006년 7월 <한경비즈니스>의 “미술품 경매시장도 해외에서 한국 작가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높은 수익성이 알려지면서 수요가 늘고 있다. ‘눈’ 밝은 이들은 이미 ‘아트테크’에 발을 들여놓았다”라는 기사에서다. 이후로 ‘아트 테크’는 ‘아트 재테크’라는 말과 함께 종종 언론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각 단어의 뜻만 살펴봤을 때 적절한 조어라 할 수 없다. ‘테크’는 ‘테크닉, 혹은 테크놀로지’의 줄임말로, 단어 자체에 ‘재산 관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투자’의 개념을 담은 ‘재(財)’자가 삭제된 ‘아트 테크’ 역시 뜻만 보면 ‘예술(관련) 기술’이라는 의미다. 실제 2007년 <파이낸셜 뉴스>에서는 ‘아트 테크’를 ‘예술(관련) 기술’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기사를 싣기도 했다. “중·장기적으로 건설업계의 저작권 트렌드는 단순 디자인보다는 모방이 어려운 기술과 예술성을 결합한 ‘아트 테크(Arttech)’가 중심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라는 보도가 그것이다. 현재 이 용어의 쓰임새만 보자면 ‘아트 테크’보다 ‘아트 재테크’가 더 적절한 표현이겠지만, ‘재테크’ 역시 한자어와 영어를 결합한 일본식 조어로 권장할 만한 단어가 아니다. ‘재테크’ 자체가 순화의 대상이다. 따라서 새말 모임에서는 ‘아트 테크’를 대신할 우리말로 ‘예술품 투자’라는 새말을 선보였다. 이미 국립국어원에서 1992년에 ‘재테크’를 ‘재산 관리’ ‘이재(理財)’로 순화해 소개한 바 있고, ‘재무 기술’이라는 대체어도 쓰이고 있으니 이를 먼저 활용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투자’라는 표현에 미치지 못했다. ‘투자’가 훨신 쉽고, 직관적으로 다가온다는 의견이 있었던 데다 글자 수도 두 자로 단출하다. 이전에 ‘리셀 테크’라는 신조어를 ‘재판매 투자’라는 새말로 다듬어 발표한 전례도 참고가 되었다. 한편 다소 어렵고 낯선 표현이지만 ‘재테크’라는 뜻을 충실히 살려 ‘예술품 이재’라는 후보 말도 함께 여론조사에 붙여보았으나,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예술품 투자’가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음으로써 ‘아트 테크’를 대체하는 새말로 최종 결정되었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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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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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끼워 맞춘 '블루 푸드', 국민의 선택은 '수산 식품'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해양수산부는 2023년 5월 17일 비상경제장관회의 겸 수출투자대책회의에서 ‘글로벌 시장 선도 K-블루 푸드 수출 전략’을 발표하며, 지난 1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도 “블루 푸드 수출 규모를 2027년까지 45억 달러로 확대하겠다고 보고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블루 푸드(blue food)’란 생선, 조개류, 해조류와 같은 수산 식품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정부 기관이 정책을 발표하면서 ‘수산 식품’이라는 엄연한 우리말을 두고 ‘블루 푸드’라는 외국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블루 푸드’라는 용어가 국내 언론에 처음 소개된 것은 2021년 7월이다. 26~28일에 열린 유엔 푸드시스템 정상회의에서 세계 빈곤과 불평등을 퇴치하고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식생활을 전환하기 위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발표된 7개 실천 연합 중 기아 종식, 지역농산물 활용 학교급식, 식품 폐기물 감축 등과 더불어 ‘블루 푸드’가 꼽혔다는 소식이었다. 특히 지구 온난화 등 환경 위기를 맞아 수산 식품이 주목받고 있다. 과학잡지 <네이처> 등의 분석에 따르면 수산 식품은 먹거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생길 환경 오염의 가능성이 비교적 낮고 온실가스 방출량도 상대적으로 적다. 유엔 푸드시스템 정상회의가 수산 식품에 주목한 이유다. 그래서 해수부도 “수산 식품이 최근 ‘블루 푸드’로 재정의되며 지속 가능하고 건강한 미래 식량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소비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며 육성 방향을 설명(<주간조선>, 2023년 5월)”한 것이다. 나아가 ‘블루 푸드’라는 용어를 더 널리 알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농어민신문>은 7월 11일자 기사에서 “(설문 응답자 중) ‘블루 푸드’ 용어를 ‘못 들어봤다’고 답한 비중은 71.4%로 조사됐다”며 “미래수산특위는 ‘국민들이 블루 푸드의 영양학·환경적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론, SNS, 온라인 플랫폼 등을 활용한 정보 제공 다각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나타냈다”고 보도했다. 그러니까 정부는 ‘수산 식품’이라는 기존 용어에 ‘친환경’이라는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블루 푸드’라는 외국어를 의도적으로 도입하여 홍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꼭 외국어를 써야만 하는 것일까? <뉴시스> 역시 2023년 1월 4일 기사에서 “바다를 연상시키는 ‘블루’로 그 뜻을 유추할 수도 있지만, 생소하다. 일반 국민들이 알기 쉽게 수산물이나 수산 식품, 미래 먹거리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라고 논평한 바 있다. 게다가 ‘블루 푸드’는 영어사전에 ‘색깔이 푸른 음식(블루베리, 블랙베리, 건포도 등)을 일컫는 말’로 등재되어 있는 바, 의미가 혼동될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블루 푸드’는 어떤 우리말로 갈음할 수 있을까. 그동안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우리말 가운데 ‘블루’라는 단어는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대체되었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 우울’로, ‘블루 콘텐츠’는 ‘해양 문화자원’으로, ‘블루 벨트’는 ‘청정수역, 근해 보호지역’으로, ‘블루칩’은 ‘우량주’로, ‘블루오션’은 ‘대안시장’으로 제시했다. 이번에 ‘블루 푸드’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에서는 기존에 쓰여온 ‘수산 식품’, ‘푸르다/파랗다’는 색깔을 살린 ‘물푸른 식품’, ‘청청식품’을 후보말로 올렸다. ‘블루 푸드’를 고스란히 우리말로 옮긴다면 ‘푸른 식품’이라는 표현도 가능하겠으나, 녹색 식품으로 혼동할 수 있어서 제외했다. 국민여론조사 결과, 익숙하게 접해온 ‘수산 식품’의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았고, 최종 우리말로 결정되었다. 제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수산 식품에 긍정적인 의미를 더 부여하겠다는 정부 등의 의도는 좋았으나, 기왕 대대적으로 홍보할 작정이었다면 애초에 영어 이름을 붙이는 대신 좀 더 새롭고 멋진 우리말 표현을 만들어냈다면 더욱 바람직했으리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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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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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노인의 좋은 죽음 이야기 고현종(노년 유니온 사무처장) 노인들과 대화할 때 알아듣지 못해서 답답하거든 이 점을 기억해 두자.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당신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신용희(73세) 씨가 세상에 던지는 불평이다. 신용희 씨는 얼마 전 딸 전화를 받았다. “엄마, 요즘 노인들 많아지고 하니까 웰다잉이 대세야. 엄마도, 건강할 때 준비 좀 해.” “나, 운동 열심히 하고 있다. 걱정하지마라” “아니, 운동하라는 말이 아니고 웰다잉이라고” “웰... 뭐라고?” “엄마는 한국말도 못 알아들어!” 딸의 큰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더는 묻지 못하고 알았다고 했다. 웰다잉 뭐라고,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하면 안 되나. 2023년 현재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8.4%이다. 2070년에는 46.4%로 전체인구의 절반이 노인이 된다. 노인이 되면 익숙한 단어나 말도 잘 들리지 않는데 외국어를 남발해서 소통을 어렵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신용희 씨가 웰다잉(well-dying)을 이해한 것은 노인 일자리에 참여하면서다. 노인 일자리 참여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구청에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갔다. “70대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을까요?” 담당 주무관은 “시니어클럽(senior club)으로 가세요. 거기에 일자리가 많아요.” “어디요?” “시니어클럽이요” “노인 일자리를 찾는데 무슨 사교클럽을 가보라고 하면 어떡해요!” “시니어클럽은 노인 일자리 하는 곳입니다!” 노인 일자리 전담 기관이라고 하면 될 것을 시니어 클럽이라는 외국어를 써서 신용희 씨를 당황하게 만들고 주무관과 언성을 높이게 했다. 신용희 씨는 노인 일자리 전담 기관에서 일하면서 소양 교육을 받았다. 소양 교육 주제는 웰다잉이었다. 딸에게 무시당했던 그 웰다잉. 신용희 씨는 교육이 끝나고 사회복지사에게 물었다. 웰다잉이 죽음을 잘 준비하자는 거 아니냐고 근데 왜 알아듣기 어렵게 영어를 써야 하냐고.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영어를 섞어 줘야 폼 나잖아요.” “요즘 노래 가사도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쓰잖아요.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웰다잉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을 의학적 치료에 의존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되었다. 국어사전에는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국어문화원연합회가 2023년 4월 28일부터 5월 4일까지 국민 2,500여 명을 대상으로 ‘어려운 외국어에 대한 우리말 대체어 국민 수용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0.2%는 웰다잉이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고 대답했다. 가장 적절한 대체어로 품위사는 62.9%를 적절하다고 답했고, 존엄사는 47.3%로 나타났다. 다만 이 조사에서 주어진 선택지는 ‘품위사’, ‘존엄사’, ‘존중사’, ‘존경사’였기에 품위사가 가장 높은 선택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70세 이상 노인분들에게 물어보았다. 웰다잉을 어떤 한국어로 바꾸면 좋을지. 어떤 말로 표현하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지. 여론의 지지를 많이 받은 품위사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절이 생각나.” “무슨 주식회사 같은데.” “품위사도 결국 한자어잖아. 생소해.” 노인들은 품위사보다는 좋은 죽음, 평온한 죽음이 이해하기 쉽고 입에도 잘 달라붙는다고 했다. 좋은 죽음, 평온한 죽음은 죽음을 부드럽게 표현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준다. 이런 표현은 사람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위로와 추모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신용희 씨는 웰다잉이라는 외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자신을 책망했다. “나만 못 난 것 같고. 무식이 탄로 나는 것 같고. 창피해서 몰라도 아는 척 고개를 까딱이지.” 노인들은 아파트 이름에 외국어가 많이 등장하는 게 부모들이 집을 잘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거라는 농을 건넨다. 신용희 씨는 필자와 함께 웰다잉을 대체하는 한국어를 고민하면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외국어 모르는 거 당연한 거지. 외국어를 한국어를 바꿔 말 할 수 있는 게 더 큰 능력이잖아.” 자신은 웰다잉을 ‘좋은 죽음’으로 부르겠다고 한다. 좋은 죽음의 핵심은 내 뜻대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연명 치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장기와 시신 기증은 할 것인가. 장례 절차, 재산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등에 대해 미리 정하는 것이다. 가족과 타인에게 부담 주지 않고 가족 등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많이 하기, 소원한 사람과 화해하기,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 전하기를 자신의 의지대로 실행하겠다고 한다. 신용희 씨는 여기에 좋은 죽음의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남은 생은 외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주눅 들지 않고 한국어를 사랑하는 당당한 세종대왕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것이란다. 이 또한 좋은 죽음의 핵심인 자신의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에. 고현종(사무처장) 현) 노년 유니온 사무처장 전) 서울시 공공갈등관리 심의위원 전) 폐지 수집 노인을 위한 네트워크 실행위원 저서: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2013, 피어나)> 공저, <민중의 정치미학(2022, 비공)>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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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한글문화연대
- 등록일 : 20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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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세이브케이션(Savecation)' 말고 '알뜰 휴가' 떠나자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발표된 새말을 보다 보면 ‘새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처음 접하는 신조어들이 더러 있다. 그리고 이 신조어의 뜻이 무엇일지 단박에 짐작하지 못할 때도 적지 않다. 다소 ‘생뚱맞아서’다. ‘세이브케이션(savecation)’도 그랬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세이브 더 칠드런’이란 단체의 목적처럼 무엇인가를 구한다는 뜻인가. 풀이말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여행을 즐기려는 경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절약한다는 의미의 ‘세이브(save)’와 휴가를 뜻하는 ‘베이케이션(vacation)’을 합친 말이다. 2023년 3월 《싱글리스트》라는 언론매체에서 처음 사용했고, 이후 호텔 예약 플랫폼 업계의 신상품 소개 기사에 거듭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 매체가 최초 유통한 말로 짐작된다. “코로나19가 확산하던 시기에 유행한 럭셔리 호캉스 등 과감한 소비 트렌드는 최근 고물가 기조 속 알찬 구성으로 여행을 즐기려는 ‘세이브케이션’ 등이 주목받고 있다(《매일경제》 2023년 4월)”는 기사가 그 용례다. 정부 정책과 연관시켜 사용한 사례도 있다. “지난 29일 기획재정부는 ‘내수 붐업 패키지’를 공개”했다면서 이를 “‘세이브케이션’을 지원하는 정책”이라고 소개한 기사가 그것이다(《아시아에이》 2023년 4월). 갓 태어난 신조어라 그런지 아직은 그 용례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여러 언론 매체가 속속 ‘신조어 사전’ 등의 형식으로 이 말을 소개하고 있어 사용이 제법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과연 이 같은 조어는 방법상, 의미상으로 타당한 것일까. 우선 ‘~케이션(-cation)’의 사전상 의미를 살펴보면 ‘휴가라는 의미를 담은 접미사’임이 맞다. 영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로는 ‘프리케이션(pre-cation, 새 직업을 시작하기 유급 휴가)’, ‘맨케이션(mancation, 남자들끼리 모여 게임, 골프 등을 즐기며 보내는 휴가)’, ‘워케이션(wokcation, 휴가 겸 출장) 등이 있다. 하지만 ‘세이브케이션’은 영어사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 영어권에서는 단어로 인정하지 않는 말인 것이다. 대신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뜻풀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색 결과 상단에서 보이는 뜻이나 용례는 국내에서의 쓰임과 거리가 멀다. “부부가 관계 개선을 위해 서로에게 집중하고자 떠나는 여행/휴가”를 뜻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권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저비용 여행(혹은 이를 위한 용품 구매)’을 표방한 상품 광고가 있다. 그러나 ‘세이브’를 ‘저축한다’는 의미보다 ‘(부부간의 관계를) 구조한다’라는 뜻에 초점을 맞춰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행이나 레저 업계는 이외에도 ‘-cation’이란 접미사를 붙여 여러 상품을 개발해 소개하고 있다. ‘키즈케이션’, ‘카페케이션’, ‘아트케이션’ 등이 그런 사례이다. 그러다 보니 ‘세이브케이션’처럼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엉뚱하게 쓰인 사례도 있다.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숙박은 하지 않고 낮에만 이용하는 호텔 상품’이란 뜻의 ‘데이케이션(daycation)’을 ‘주말은 제외하고 평일에만 이용할 수 있는 상품’이라고 내놓은 경우다. 과도하게 영어 이름을 붙이는 상품 전략이 빚은 실수였다. 이렇듯 불필요한 영어 사용은 물론 영어권의 쓰임새와 일치하지 않는 신조어인 ‘세이브케이션’은 더 널리 퍼지기 전에 우리말 대체어를 만들어 신속히 보급하는 게 시급하겠다. 새말 모임에서 제안한 우리말 후보에 1순위가 ‘알뜰 휴가’였다.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라는 의미도 있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의 뜻을 가지기 때문이다. 실제 ‘알뜰(한) 휴가’, ‘알뜰 여행’ 등은 관련 업체나 언론에서도 많이 사용해 온 표현들이다. 더불어 ‘실속 휴가’, ‘가성비 휴가’, ‘절약 휴가’, ‘아낌 휴가’ 등 다양한 후보말이 올랐으나, 역시 입에 착 붙는 ‘알뜰 휴가’가 여론조사에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고, 최종 새말로 선정되었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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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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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욜드 대신 청노년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이번에 새로 다듬은 외국어 신조어 ‘욜드’는 마치 갈라파고스섬의 생물 같다. 애초 바다 건너에서 들어왔으나 어느새 다른 육지나 섬에서는 모두 멸종하고, 오로지 갈라파고스에서만 살아남은 희귀 생물. ‘욜드’ 역시 해외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나 현재 그 어느 나라에서도 용례를 찾을 수 없고 오로지 우리 언론에서만 종종 쓰이니 말이다. ‘욜드(YOLD)’란 ‘young old’를 줄인 말이다. 우리말샘 사전에 따르면 “노령기에 접어든 베이비 붐 세대로 이루어진, 65세부터 75세 사이의 노인층을 이르는 말”이다. 즉 ‘젊은 노인’이라는 뜻이다. 우리 언론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2019년 11월 <아주경제>에서다. 당시 기사는 “일본 사람들은 곧잘 일본식 영어를 만들어 역수출하는 재주가 있다. 가라오케가 대표적인 사례”라며 “욜드 역시 이 같은 일본식 영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욜드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사회적 배경 역시 언론의 용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은퇴 후에도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능동적 소비 주체로 급부상한 베이비붐 세대인 ‘욜드’는 투자나 여가 활동 등에서도 이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미래지향적이고 트렌디하다.”(<서울신문> 2023년 3월) “젊게 살려는 노년층의 욕구가 ‘욜드’의 유행을 몰고 왔지만 청춘처럼 즐기려면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이데일리> 2022년 10월) 그러니까 욜드는 단순히 특정 연령대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은퇴 연령이 지나서도 젊은이 못잖게 강한 경제력과 적극성으로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이들의 등장을 주목한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2020년 세계경제대전망’에서 앞으로 이들 세대가 항공·여행·금융·의료 등 다양한 부문의 산업에서 중요한 고객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또한 <포브스>도 2020년 1월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Old Lang Syne)’을 살짝 비틀어 ‘욜드 랭 사인을 들어보자(Let's Hear It for Yold Lang Syne)’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들을 분석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반짝 주목받은 뒤로 영어권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yold’를 검색해 보면 사전에 등장하기는 한다. 근데 그 뜻이 ‘잘 속는 사람, 멍청이’라는 속어다. 자칫 잘못 사용했다가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영어 사용자들이 단어 뜻을 자유롭게 유추해 올리는 공개 영어사전 ‘urban dictionary’에도 ‘욜드’라는 단어가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젊은 노인’이라는 뜻과 반대로 “젊은 사람이 나이 먹은 척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을 뿐이다. 욜드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냈다는 일본에서는 어떨까? 역시 구글에서 일본어 ‘욜드(ヨールド 혹은 ヨルド)’를 검색해 보아도 위 의미로 쓰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갈라파고스섬의 생물처럼 우리나라에서만 끈질기게 유통되는 ‘욜드’를 대체할 새말로는 어떤 표현이 좋을까? 새말 모임 논의에서는 이들의 물리적 연령대를 가리키는 ‘노년(노인)’이라는 말과, 이들에게 새로이 부각된 ‘젊다’는 성격을 결합한 용어가 주로 후보군에 올랐다. ‘젊은 노년’ ‘젊노인’ ‘청노인’ ‘청노년’ ‘풋노인’ 등이다. 이채롭게는 “은퇴를 했지만 경제력을 갖고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금퇴족’이라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 중 ‘젊은 노년’이란 표현이 가장 개념을 충실하게 설명한 용어이긴 하지만 말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세 글자가 적절하다고 판단해, ‘젊노인’ ‘젊노족’ ‘청노년’ 세 가지가 최종 후보로 압축되었다.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 ‘청노년’이 가장 높은 지지를 얻어 새말로 최종 선정되었다. 새말 모임에서 그간 다룬 외국어 신조어 중에는 기존 언론 등에 이를 대신할 만한 우리말 표현이 제시된 경우가 적지 않다. 혹은 신조어가 들어오기 전 이미 쓰이고 있던 우리말을 되살려낸 예도 있다. 하지만 ‘욜드’의 경우 그런 용례가 소개된 바 없다. ‘청노년’이라는 표현은 이번에 처음 탄생한, 그야말로 ‘새말’이다. 언론의 용례로는 경남도청에서 배포한 홍보 자료에 “청노년이 다같이 함께하는….”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청년과 노년층이 함께한다’는 뜻으로 쓰인 경우였다. 이렇게 기존에 쓰인 적이 별로 없는 ‘청노년’ 같은 ‘진짜배기 새말’은 용례가 있는 경우보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더더욱 사용자들의 애정이 필요하다. 아낌없이 써주자. 새로운 우리말이 어서 빨리 든든히 자리 잡고 쑥쑥 커나갈 수 있도록.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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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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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금융 분야의 새말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최근 들어 금융 분야의 외국어 용어가 속속 눈에 띄고 있다. 디지털/가상현실 분야야 워낙 새로이 떠오르는 기술 영역이기 때문에 외국어 신조어가 피치 못하게 생겨날 수 있다지만(‘디지털’ 자체도 우리말로 다듬어져 정착하는 데 실패한 용어다), 금융은 전혀 ‘새로운 분야’가 아니다. 유럽에서 그 연원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사업일 뿐 아니라(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이 생긴 것은 1674년이다) 비록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이긴 하나, 100여 년 전 개화와 함께 ‘금융’과 관련된 주요 개념들이 우리말로 정착했다. 그런데 새삼 이들이 영어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유로는 금융 시장의 세계화, 서구에서 공부한 학자들의 영어 과용 그리고 언중이 이를 거르지 않고 받아들인 탓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새말 모임에서도 그 어느 분야보다 금융 용어를 많이 다듬고 있기에, 이번 꼭지에서는 그 몇 가지를 한꺼번에 훑어보기로 한다. 첫 번째가 ‘머니 무브(money move)’. “낮은 금리 등의 이유로 자산이 손실 위험이 없는 안전 자산에서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주식, 채권 등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2005년 6월 엠비엔에서 처음 사용된 이 말은 “예금에서 투자로의 시중자금의 이동을 뜻하는 이른바 ‘머니무브’”라고 소개되고 있다. 설명 안에 ‘자금’의 ‘이동’이라는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이를 ‘자금 이동’이라고 간단히 표현하면 될 터. 그런데도 굳이 ‘이른바’라는 수식에 작은따옴표로 인용을 해가며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 가까이 됐다. 새말 모임에서는 관습적으로 작은따옴표 안에 쓰여온 ‘머니 무브’를 완전히 털어버리고 ‘자금 이동’이라는 우리말만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다음 살펴볼 말은 ‘뱅크 런(bank run)’이다. “거래 은행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로, <한국경제>가 2000년 2월에 처음 소개한 외국어다. 그간 더러 쓰이기는 했지만 요즘 들어 폭발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은 ‘오픈 런(open run, 매장이 문을 열기를 기다려 바로 뛰어가 구매하는 행위)’이라는 말이 ‘뜨면서’부터인 듯하다. 언론 기사로만 50만 회 가까이 인용되었으니 상당한 사용 빈도다. 심지어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과거의 뱅크 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가 일어나면서 ‘디지털 런’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중앙일보> 2023년 5월)”고 한다. 영어로는 ‘은행으로 달려간다’는 뜻이지만 그 함의는 ‘서둘러 많은 돈을 인출한다’는 뜻이다. ‘은행’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아도 행위 자체로 뜻이 설명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말 다듬기도 ‘은행’을 생략하고 ‘인출 폭주’, ‘인출 몰림’, ‘예금 탈출’ 등 구체적 행동을 묘사한 말을 중심으로 했고, 이 중 여론조사를 거쳐 ‘인출 폭주’를 새말로 확정했다. 그 외에 ‘런(run)’이라는 말꼬리가 붙은 금융 용어인 ‘본드 런(bond run)’ 역시 우리말로 다듬었다. “투자자들이 앞다퉈 채권을 파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런’이라는 공통의 꼬리말에 맞춰 ‘뱅크 런’의 새말인 ‘인출 폭주’와 압운을 통일한 ‘채권 매도 폭주’ 등을 후보로 올렸는데, 여론조사 결과 ‘채권 매도 사태’가 최종 새말로 결정되었다. 때로 이렇게 같은 영어 단어(run)도 우리말로는 다르게 다듬은 표현이 언중에게 선택되기도 한다. 마지막 살펴볼 말은 뱅크데믹(bankdemic ←bank pandemic)이다. “은행에 대한 공포가 감염병처럼 급속하게 번진다”는 뜻인데, 2023년 3월 <매일경제>에 처음 소개되었으니 가장 ‘따끈따끈한’ 신조어다. 이 기사에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4일 ‘은행에 대한 글로벌 시장의 우려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며 이를 은행과 팬데믹의 합성어인 ‘뱅크데믹’으로 규정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부실 은행에 대한 우려, 금융권 전반의 불안정에 대한 공포 역시 새로운 현상이 아님에도 이런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은 코로나 대유행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이 처음 이 말을 만들어 보도한 이후 뱅크데믹이라는 표현은 영어권에서 사라졌다. 오직 우리 언론에서만 2,700번가량 인용되었다. 새말 모임에서 ‘뱅크데믹’을 대신하기 위해 제시한 새말 후보는 ‘은행 불신 확산’ ‘은행 불신증’ ‘은행 공황’ 등이다. 앞서 ‘뱅크 런’은 ‘은행’이라는 단어보다 ‘이용자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 다듬었지만, ‘뱅크데믹’은 불신 혹은 공포의 대상이 ‘은행’이라는 점이 핵심이기 때문에 ‘은행’이라는 단어를 살린 것이다. 이 중 언중이 선택한 말은 ‘은행 불신 확산’이었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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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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