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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노인의 좋은 죽음 이야기 고현종(노년 유니온 사무처장) 노인들과 대화할 때 알아듣지 못해서 답답하거든 이 점을 기억해 두자.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당신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신용희(73세) 씨가 세상에 던지는 불평이다. 신용희 씨는 얼마 전 딸 전화를 받았다. “엄마, 요즘 노인들 많아지고 하니까 웰다잉이 대세야. 엄마도, 건강할 때 준비 좀 해.” “나, 운동 열심히 하고 있다. 걱정하지마라” “아니, 운동하라는 말이 아니고 웰다잉이라고” “웰... 뭐라고?” “엄마는 한국말도 못 알아들어!” 딸의 큰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더는 묻지 못하고 알았다고 했다. 웰다잉 뭐라고,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하면 안 되나. 2023년 현재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8.4%이다. 2070년에는 46.4%로 전체인구의 절반이 노인이 된다. 노인이 되면 익숙한 단어나 말도 잘 들리지 않는데 외국어를 남발해서 소통을 어렵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신용희 씨가 웰다잉(well-dying)을 이해한 것은 노인 일자리에 참여하면서다. 노인 일자리 참여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구청에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갔다. “70대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을까요?” 담당 주무관은 “시니어클럽(senior club)으로 가세요. 거기에 일자리가 많아요.” “어디요?” “시니어클럽이요” “노인 일자리를 찾는데 무슨 사교클럽을 가보라고 하면 어떡해요!” “시니어클럽은 노인 일자리 하는 곳입니다!” 노인 일자리 전담 기관이라고 하면 될 것을 시니어 클럽이라는 외국어를 써서 신용희 씨를 당황하게 만들고 주무관과 언성을 높이게 했다. 신용희 씨는 노인 일자리 전담 기관에서 일하면서 소양 교육을 받았다. 소양 교육 주제는 웰다잉이었다. 딸에게 무시당했던 그 웰다잉. 신용희 씨는 교육이 끝나고 사회복지사에게 물었다. 웰다잉이 죽음을 잘 준비하자는 거 아니냐고 근데 왜 알아듣기 어렵게 영어를 써야 하냐고.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영어를 섞어 줘야 폼 나잖아요.” “요즘 노래 가사도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쓰잖아요.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웰다잉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을 의학적 치료에 의존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되었다. 국어사전에는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국어문화원연합회가 2023년 4월 28일부터 5월 4일까지 국민 2,500여 명을 대상으로 ‘어려운 외국어에 대한 우리말 대체어 국민 수용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0.2%는 웰다잉이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고 대답했다. 가장 적절한 대체어로 품위사는 62.9%를 적절하다고 답했고, 존엄사는 47.3%로 나타났다. 다만 이 조사에서 주어진 선택지는 ‘품위사’, ‘존엄사’, ‘존중사’, ‘존경사’였기에 품위사가 가장 높은 선택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70세 이상 노인분들에게 물어보았다. 웰다잉을 어떤 한국어로 바꾸면 좋을지. 어떤 말로 표현하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지. 여론의 지지를 많이 받은 품위사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절이 생각나.” “무슨 주식회사 같은데.” “품위사도 결국 한자어잖아. 생소해.” 노인들은 품위사보다는 좋은 죽음, 평온한 죽음이 이해하기 쉽고 입에도 잘 달라붙는다고 했다. 좋은 죽음, 평온한 죽음은 죽음을 부드럽게 표현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준다. 이런 표현은 사람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위로와 추모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신용희 씨는 웰다잉이라는 외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자신을 책망했다. “나만 못 난 것 같고. 무식이 탄로 나는 것 같고. 창피해서 몰라도 아는 척 고개를 까딱이지.” 노인들은 아파트 이름에 외국어가 많이 등장하는 게 부모들이 집을 잘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거라는 농을 건넨다. 신용희 씨는 필자와 함께 웰다잉을 대체하는 한국어를 고민하면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외국어 모르는 거 당연한 거지. 외국어를 한국어를 바꿔 말 할 수 있는 게 더 큰 능력이잖아.” 자신은 웰다잉을 ‘좋은 죽음’으로 부르겠다고 한다. 좋은 죽음의 핵심은 내 뜻대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연명 치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장기와 시신 기증은 할 것인가. 장례 절차, 재산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등에 대해 미리 정하는 것이다. 가족과 타인에게 부담 주지 않고 가족 등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많이 하기, 소원한 사람과 화해하기,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 전하기를 자신의 의지대로 실행하겠다고 한다. 신용희 씨는 여기에 좋은 죽음의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남은 생은 외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주눅 들지 않고 한국어를 사랑하는 당당한 세종대왕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것이란다. 이 또한 좋은 죽음의 핵심인 자신의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에. 고현종(사무처장) 현) 노년 유니온 사무처장 전) 서울시 공공갈등관리 심의위원 전) 폐지 수집 노인을 위한 네트워크 실행위원 저서: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2013, 피어나)> 공저, <민중의 정치미학(2022, 비공)>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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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고현종
- 등록일 : 20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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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세이브케이션(Savecation)' 말고 '알뜰 휴가' 떠나자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발표된 새말을 보다 보면 ‘새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처음 접하는 신조어들이 더러 있다. 그리고 이 신조어의 뜻이 무엇일지 단박에 짐작하지 못할 때도 적지 않다. 다소 ‘생뚱맞아서’다. ‘세이브케이션(savecation)’도 그랬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세이브 더 칠드런’이란 단체의 목적처럼 무엇인가를 구한다는 뜻인가. 풀이말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여행을 즐기려는 경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절약한다는 의미의 ‘세이브(save)’와 휴가를 뜻하는 ‘베이케이션(vacation)’을 합친 말이다. 2023년 3월 《싱글리스트》라는 언론매체에서 처음 사용했고, 이후 호텔 예약 플랫폼 업계의 신상품 소개 기사에 거듭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 매체가 최초 유통한 말로 짐작된다. “코로나19가 확산하던 시기에 유행한 럭셔리 호캉스 등 과감한 소비 트렌드는 최근 고물가 기조 속 알찬 구성으로 여행을 즐기려는 ‘세이브케이션’ 등이 주목받고 있다(《매일경제》 2023년 4월)”는 기사가 그 용례다. 정부 정책과 연관시켜 사용한 사례도 있다. “지난 29일 기획재정부는 ‘내수 붐업 패키지’를 공개”했다면서 이를 “‘세이브케이션’을 지원하는 정책”이라고 소개한 기사가 그것이다(《아시아에이》 2023년 4월). 갓 태어난 신조어라 그런지 아직은 그 용례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여러 언론 매체가 속속 ‘신조어 사전’ 등의 형식으로 이 말을 소개하고 있어 사용이 제법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과연 이 같은 조어는 방법상, 의미상으로 타당한 것일까. 우선 ‘~케이션(-cation)’의 사전상 의미를 살펴보면 ‘휴가라는 의미를 담은 접미사’임이 맞다. 영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로는 ‘프리케이션(pre-cation, 새 직업을 시작하기 유급 휴가)’, ‘맨케이션(mancation, 남자들끼리 모여 게임, 골프 등을 즐기며 보내는 휴가)’, ‘워케이션(wokcation, 휴가 겸 출장) 등이 있다. 하지만 ‘세이브케이션’은 영어사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 영어권에서는 단어로 인정하지 않는 말인 것이다. 대신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뜻풀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색 결과 상단에서 보이는 뜻이나 용례는 국내에서의 쓰임과 거리가 멀다. “부부가 관계 개선을 위해 서로에게 집중하고자 떠나는 여행/휴가”를 뜻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권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저비용 여행(혹은 이를 위한 용품 구매)’을 표방한 상품 광고가 있다. 그러나 ‘세이브’를 ‘저축한다’는 의미보다 ‘(부부간의 관계를) 구조한다’라는 뜻에 초점을 맞춰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행이나 레저 업계는 이외에도 ‘-cation’이란 접미사를 붙여 여러 상품을 개발해 소개하고 있다. ‘키즈케이션’, ‘카페케이션’, ‘아트케이션’ 등이 그런 사례이다. 그러다 보니 ‘세이브케이션’처럼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엉뚱하게 쓰인 사례도 있다.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숙박은 하지 않고 낮에만 이용하는 호텔 상품’이란 뜻의 ‘데이케이션(daycation)’을 ‘주말은 제외하고 평일에만 이용할 수 있는 상품’이라고 내놓은 경우다. 과도하게 영어 이름을 붙이는 상품 전략이 빚은 실수였다. 이렇듯 불필요한 영어 사용은 물론 영어권의 쓰임새와 일치하지 않는 신조어인 ‘세이브케이션’은 더 널리 퍼지기 전에 우리말 대체어를 만들어 신속히 보급하는 게 시급하겠다. 새말 모임에서 제안한 우리말 후보에 1순위가 ‘알뜰 휴가’였다.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라는 의미도 있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의 뜻을 가지기 때문이다. 실제 ‘알뜰(한) 휴가’, ‘알뜰 여행’ 등은 관련 업체나 언론에서도 많이 사용해 온 표현들이다. 더불어 ‘실속 휴가’, ‘가성비 휴가’, ‘절약 휴가’, ‘아낌 휴가’ 등 다양한 후보말이 올랐으나, 역시 입에 착 붙는 ‘알뜰 휴가’가 여론조사에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고, 최종 새말로 선정되었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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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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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욜드 대신 청노년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이번에 새로 다듬은 외국어 신조어 ‘욜드’는 마치 갈라파고스섬의 생물 같다. 애초 바다 건너에서 들어왔으나 어느새 다른 육지나 섬에서는 모두 멸종하고, 오로지 갈라파고스에서만 살아남은 희귀 생물. ‘욜드’ 역시 해외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나 현재 그 어느 나라에서도 용례를 찾을 수 없고 오로지 우리 언론에서만 종종 쓰이니 말이다. ‘욜드(YOLD)’란 ‘young old’를 줄인 말이다. 우리말샘 사전에 따르면 “노령기에 접어든 베이비 붐 세대로 이루어진, 65세부터 75세 사이의 노인층을 이르는 말”이다. 즉 ‘젊은 노인’이라는 뜻이다. 우리 언론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2019년 11월 <아주경제>에서다. 당시 기사는 “일본 사람들은 곧잘 일본식 영어를 만들어 역수출하는 재주가 있다. 가라오케가 대표적인 사례”라며 “욜드 역시 이 같은 일본식 영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욜드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사회적 배경 역시 언론의 용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은퇴 후에도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능동적 소비 주체로 급부상한 베이비붐 세대인 ‘욜드’는 투자나 여가 활동 등에서도 이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미래지향적이고 트렌디하다.”(<서울신문> 2023년 3월) “젊게 살려는 노년층의 욕구가 ‘욜드’의 유행을 몰고 왔지만 청춘처럼 즐기려면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이데일리> 2022년 10월) 그러니까 욜드는 단순히 특정 연령대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은퇴 연령이 지나서도 젊은이 못잖게 강한 경제력과 적극성으로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이들의 등장을 주목한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2020년 세계경제대전망’에서 앞으로 이들 세대가 항공·여행·금융·의료 등 다양한 부문의 산업에서 중요한 고객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또한 <포브스>도 2020년 1월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Old Lang Syne)’을 살짝 비틀어 ‘욜드 랭 사인을 들어보자(Let's Hear It for Yold Lang Syne)’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들을 분석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반짝 주목받은 뒤로 영어권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yold’를 검색해 보면 사전에 등장하기는 한다. 근데 그 뜻이 ‘잘 속는 사람, 멍청이’라는 속어다. 자칫 잘못 사용했다가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영어 사용자들이 단어 뜻을 자유롭게 유추해 올리는 공개 영어사전 ‘urban dictionary’에도 ‘욜드’라는 단어가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젊은 노인’이라는 뜻과 반대로 “젊은 사람이 나이 먹은 척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을 뿐이다. 욜드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냈다는 일본에서는 어떨까? 역시 구글에서 일본어 ‘욜드(ヨールド 혹은 ヨルド)’를 검색해 보아도 위 의미로 쓰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갈라파고스섬의 생물처럼 우리나라에서만 끈질기게 유통되는 ‘욜드’를 대체할 새말로는 어떤 표현이 좋을까? 새말 모임 논의에서는 이들의 물리적 연령대를 가리키는 ‘노년(노인)’이라는 말과, 이들에게 새로이 부각된 ‘젊다’는 성격을 결합한 용어가 주로 후보군에 올랐다. ‘젊은 노년’ ‘젊노인’ ‘청노인’ ‘청노년’ ‘풋노인’ 등이다. 이채롭게는 “은퇴를 했지만 경제력을 갖고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금퇴족’이라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 중 ‘젊은 노년’이란 표현이 가장 개념을 충실하게 설명한 용어이긴 하지만 말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세 글자가 적절하다고 판단해, ‘젊노인’ ‘젊노족’ ‘청노년’ 세 가지가 최종 후보로 압축되었다.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 ‘청노년’이 가장 높은 지지를 얻어 새말로 최종 선정되었다. 새말 모임에서 그간 다룬 외국어 신조어 중에는 기존 언론 등에 이를 대신할 만한 우리말 표현이 제시된 경우가 적지 않다. 혹은 신조어가 들어오기 전 이미 쓰이고 있던 우리말을 되살려낸 예도 있다. 하지만 ‘욜드’의 경우 그런 용례가 소개된 바 없다. ‘청노년’이라는 표현은 이번에 처음 탄생한, 그야말로 ‘새말’이다. 언론의 용례로는 경남도청에서 배포한 홍보 자료에 “청노년이 다같이 함께하는….”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청년과 노년층이 함께한다’는 뜻으로 쓰인 경우였다. 이렇게 기존에 쓰인 적이 별로 없는 ‘청노년’ 같은 ‘진짜배기 새말’은 용례가 있는 경우보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더더욱 사용자들의 애정이 필요하다. 아낌없이 써주자. 새로운 우리말이 어서 빨리 든든히 자리 잡고 쑥쑥 커나갈 수 있도록.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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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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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금융 분야의 새말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최근 들어 금융 분야의 외국어 용어가 속속 눈에 띄고 있다. 디지털/가상현실 분야야 워낙 새로이 떠오르는 기술 영역이기 때문에 외국어 신조어가 피치 못하게 생겨날 수 있다지만(‘디지털’ 자체도 우리말로 다듬어져 정착하는 데 실패한 용어다), 금융은 전혀 ‘새로운 분야’가 아니다. 유럽에서 그 연원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사업일 뿐 아니라(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이 생긴 것은 1674년이다) 비록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이긴 하나, 100여 년 전 개화와 함께 ‘금융’과 관련된 주요 개념들이 우리말로 정착했다. 그런데 새삼 이들이 영어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유로는 금융 시장의 세계화, 서구에서 공부한 학자들의 영어 과용 그리고 언중이 이를 거르지 않고 받아들인 탓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새말 모임에서도 그 어느 분야보다 금융 용어를 많이 다듬고 있기에, 이번 꼭지에서는 그 몇 가지를 한꺼번에 훑어보기로 한다. 첫 번째가 ‘머니 무브(money move)’. “낮은 금리 등의 이유로 자산이 손실 위험이 없는 안전 자산에서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주식, 채권 등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2005년 6월 엠비엔에서 처음 사용된 이 말은 “예금에서 투자로의 시중자금의 이동을 뜻하는 이른바 ‘머니무브’”라고 소개되고 있다. 설명 안에 ‘자금’의 ‘이동’이라는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이를 ‘자금 이동’이라고 간단히 표현하면 될 터. 그런데도 굳이 ‘이른바’라는 수식에 작은따옴표로 인용을 해가며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 가까이 됐다. 새말 모임에서는 관습적으로 작은따옴표 안에 쓰여온 ‘머니 무브’를 완전히 털어버리고 ‘자금 이동’이라는 우리말만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다음 살펴볼 말은 ‘뱅크 런(bank run)’이다. “거래 은행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로, <한국경제>가 2000년 2월에 처음 소개한 외국어다. 그간 더러 쓰이기는 했지만 요즘 들어 폭발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은 ‘오픈 런(open run, 매장이 문을 열기를 기다려 바로 뛰어가 구매하는 행위)’이라는 말이 ‘뜨면서’부터인 듯하다. 언론 기사로만 50만 회 가까이 인용되었으니 상당한 사용 빈도다. 심지어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과거의 뱅크 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가 일어나면서 ‘디지털 런’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중앙일보> 2023년 5월)”고 한다. 영어로는 ‘은행으로 달려간다’는 뜻이지만 그 함의는 ‘서둘러 많은 돈을 인출한다’는 뜻이다. ‘은행’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아도 행위 자체로 뜻이 설명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말 다듬기도 ‘은행’을 생략하고 ‘인출 폭주’, ‘인출 몰림’, ‘예금 탈출’ 등 구체적 행동을 묘사한 말을 중심으로 했고, 이 중 여론조사를 거쳐 ‘인출 폭주’를 새말로 확정했다. 그 외에 ‘런(run)’이라는 말꼬리가 붙은 금융 용어인 ‘본드 런(bond run)’ 역시 우리말로 다듬었다. “투자자들이 앞다퉈 채권을 파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런’이라는 공통의 꼬리말에 맞춰 ‘뱅크 런’의 새말인 ‘인출 폭주’와 압운을 통일한 ‘채권 매도 폭주’ 등을 후보로 올렸는데, 여론조사 결과 ‘채권 매도 사태’가 최종 새말로 결정되었다. 때로 이렇게 같은 영어 단어(run)도 우리말로는 다르게 다듬은 표현이 언중에게 선택되기도 한다. 마지막 살펴볼 말은 뱅크데믹(bankdemic ←bank pandemic)이다. “은행에 대한 공포가 감염병처럼 급속하게 번진다”는 뜻인데, 2023년 3월 <매일경제>에 처음 소개되었으니 가장 ‘따끈따끈한’ 신조어다. 이 기사에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4일 ‘은행에 대한 글로벌 시장의 우려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며 이를 은행과 팬데믹의 합성어인 ‘뱅크데믹’으로 규정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부실 은행에 대한 우려, 금융권 전반의 불안정에 대한 공포 역시 새로운 현상이 아님에도 이런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은 코로나 대유행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이 처음 이 말을 만들어 보도한 이후 뱅크데믹이라는 표현은 영어권에서 사라졌다. 오직 우리 언론에서만 2,700번가량 인용되었다. 새말 모임에서 ‘뱅크데믹’을 대신하기 위해 제시한 새말 후보는 ‘은행 불신 확산’ ‘은행 불신증’ ‘은행 공황’ 등이다. 앞서 ‘뱅크 런’은 ‘은행’이라는 단어보다 ‘이용자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 다듬었지만, ‘뱅크데믹’은 불신 혹은 공포의 대상이 ‘은행’이라는 점이 핵심이기 때문에 ‘은행’이라는 단어를 살린 것이다. 이 중 언중이 선택한 말은 ‘은행 불신 확산’이었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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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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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갈등이 풀리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등돌림 문화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새말 모임에서 다듬는 외국어 신조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예전부터 있었던 개념으로 이미 우리말 이름이 있는데도 특별한 이유 없이 영어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말이 그 한 가지다. 이번 달 새말 모임에서 다듬은 외국어 중 ‘머니 무브’나 ‘뱅크 런’ 등이 그렇다. 딱히 새로운 현상도 아닌데 멀쩡한 우리말로 불리던 ‘자금 이동’, ‘인출 폭주’가 어느 순간 영어로 둔갑했다. 새말 모임은 원래 쓰이던 이 우리말을 새삼 ‘새말’로 되돌렸다. 또 다른 하나는 새롭게 등장한 기술이나 현상이라 우리말로 이를 일컬을 말이 정착하기 전에 영어 표현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볼 ‘캔슬 컬처(cancel culture)’가 그렇다. 캔슬 컬처는 “유명인이나 공적 지위에 있는 인사가 논쟁이 될 만한 행동이나 발언을 했을 때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스엔에스) 등에서 해당 인물에 대한 팔로우를 취소하고 거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인종, 계급, 성별 등에서 소수자를 주류 세력이 차별하고 배제하는 현상은 이전부터 있었던 터. 그런데 인터넷상의 공동체와 사회 관계망이 발달하면서 ‘(트위터 등의) 팔로우’나 ‘(페이스북의) 친구 관계’를 ‘취소’한다는 뜻에서 ‘캔슬 컬처’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용어가 널리 퍼진 것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 인터넷상의 차단, 배척 현상이 두드러지면서다. 국내 언론에 처음 소개된 것도 같은 시기인 2019년 10월 <서울신문> 기사를 통해서다. 그 외에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캔슬 컬처에 대해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자신만이 정치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타인을 비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호소했다.”(<한겨레21> 2020년 9월)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가 한국에 대해 ‘캔슬 컬처’가 심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캔슬 컬처는 유명인이 잘못을 저지르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언팔로하는 등 보이콧하는 현상을 뜻한다.”(<머니투데이> 2023년 2월 1일) 등의 용례가 있다. 이 용어는 인터넷 사회 관계망의 ‘취소’로만 쓰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상품의 불매운동,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유명인사의 창작물 고발, 연주자의 공연 출연 배제 등 온라인 외의 공간과 맥락에서도 두루 쓰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옹호한 음악인들의 무대 공연을 철회하거나 섭외를 중단한 문화계 움직임도 ‘캔슬 컬처’라 불렸다. ‘캔슬 컬처’를 우리말로 옮긴 예를 찾아보았다. 영어 뜻 그대로 옮겨 ‘취소 문화’라고 옮긴 사례(<서울신문> 등)가 간혹 있고 위키백과 역시 ‘취소 문화’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이런 ‘직역’은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온라인 사회관계망 외에서 두루 쓰이기엔 다소 부족함이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일보>나 <한겨레>는 ‘손절 문화’, ‘철회 문화’라고 옮기기도 했다. <국민일보> 역시 “캔슬은 ‘취소’보다는 지지 철회나 손절, 배척, 사회적 매장, 응징, 온라인 몰매로 해석하는 게 적절하다”고 제안한 바 있다. ‘단어+단어’의 간단한 형태로 옮기기 애매하다 보니 ‘온라인 왕따 현상’ ‘온라인상 집단 비방 문화’라고 수식하거나, 괄호 안에 문장으로 풀어서 설명을 덧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작은따옴표로 묶어 '캔슬 문화'라고 적은 뒤, 아예 우리말 뜻풀이를 생략해 버리는 경우도 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적절한 대체 우리말이 정착되지 않고, 뜻풀이도 없이 영어 표현만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로 볼 때 빨리 새말을 다듬어 보급하지 않으면 영문 ‘캔슬 컬처’가 그대로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려버리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그래서 새말 모임이 서둘러 우리말 순화작업을 할 필요가 더해진 것이다. 새말 모임에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다듬어낸 우리말 표현은 ‘배척 문화’, ‘등돌리기/등돌림(현상/문화)’, ‘지지취소 문화’, ‘거절(거부) 문화’, ‘유행성 등돌리기’, ‘추방 문화’ 등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현상만을 지칭하지 않고, ‘배척’, ‘퇴출’보다는 부드럽고 너른 폭으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을 찾고자 고민했다. 그래서 최종 결정된 후보는 ‘거부 문화’, ‘등돌림 문화’, ‘삭제 문화’였고, 이 중 여론조사 결과 ‘등돌림 문화’의 선호도가 가장 높아 최종 새말로 결정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외국어를 우리말로 다듬을 때는 한자어보다 아예 순우리말인 ‘등돌림’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겨진다. ‘ㅇ’과 ‘ㄹ’을 많이 사용해 어감도 부드럽고 입에 감긴다. 게다가, 새말 모임에서도 나온 의견처럼, 등을 돌린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갈등이 해소되었을 때 다시 앞으로 돌아서서 상대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캔슬’이라는 영어는 물론이요 ‘취소’나 ‘삭제’보다 더 희망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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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김정희
- 등록일 : 20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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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국산 영어 그린 오션 대신 친환경 시장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특정 산업을 시장 점유 정도, 발전 가능성 등에 따라 색깔로 나타낸 영어 명칭들이 있다. 아직 경쟁자가 없는 유망시장을 가리키는 ‘블루 오션’, 경쟁이 심하고 포화상태에 이른 시장 ‘레드 오션’, 기존 레드 오션에 발상의 전환을 꾀해 새로운 시장 가치를 개척하는 ‘퍼플 오션’이 그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이미 이들 중 ‘블루 오션’을 ‘대안 시장’으로, ‘레드 오션’을 ‘포화 시장’으로 다듬어 선보인 바 있다. 아직 ‘퍼플 오션’은 우리 새말로 다듬어 내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또 하나의 ‘색깔’이 등장했다. ‘그린 오션(green ocean)’이다. ‘그린’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로 뜻을 짐작해보시라. 농산물 시장? 그럴 수도 있겠다. 실제로 2006년 한 신문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 이 용어는 ‘친환경이 가진 가치를 경쟁 요소로 내세워 새로운 시장과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을 뜻한다. 영어에서 ‘친환경’은 ‘에코-프렌들리(eco-friendly)’ 혹은 말머리에 ‘에코’만을 붙여 표현하지만 ‘그린’ 역시 보편적으로 쓰인다. 친환경 단체로 유명한 ‘그린 피스’나 ‘친환경 에너지원’을 뜻하는 ‘그린 에너지’ 등이 익숙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린 오션’도 영어권에서 쓰이는 말일까. 답은 ‘그렇지 않다’. 영어권에서 ‘그린 오션’은 ‘녹색’이라는 단어의 원뜻 그대로 ‘녹색 바다’라는 뜻이다. 친환경과 관련된 뜻은 없다. 환경친화적 산업, 혹은 친환경 시장을 의미하는 ‘그린 오션’은 ‘국산 신조어’인 셈이다. 언론에서 ‘그린 오션’을 처음 언급한 것은 2005년 7월 <경향신문> 기사이다. 당시 경제 전문가 인터뷰에서 “경제와 환경이 살아야 사회가 산다는 ‘그린 경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발언에 기자가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 발전을 위한 ‘그린 오션’이 요구된다는 말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인 것이 첫 사례다. 이후 한동안 쓰임새가 잦지 않았던 이 표현은 2000년대 말 무렵부터 시민 환경 의식이 높아지고 친환경 상품이나 사업이 각광을 받으며 자주 쓰이게 되었다. 언론 용례는 다음과 같다. “음료 가운데 가장 먼저 비닐 라벨을 제거한 생수업계는 이에스지 경영을 전면에 내세우며 친환경을 기반으로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그린 오션’ 진출에 앞장서고 있다.” (<매일경제> 2021년 10월) “그린 오션이 세계 경제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세계 각국이 환경 규제를 강화하면서 반도체부터 자동차, 전자, 금융, 식품에 이르기까지 전 산업에 걸쳐 경영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이투데이> 2021년 6월) 이외에도 친환경과 관련해 ‘그린’이라는 표현이 비 온 뒤 대나무 순 돋듯 등장했는데, 이미 많은 ‘그린~’이 새말로 다듬어져 발표되었다. ‘그린 모빌리티’는 ‘친환경 이동 수단’, ‘그린 테일’은 ‘친환경 유통’, ‘그린웨이’는 녹색길, ‘그린 시티’는 ‘녹색도시’, ‘그린슈머’는 ‘녹색소비자’ 등 대부분 ‘친환경’ 혹은 ‘녹색’으로 다듬어졌다. 그런 맥락에서 ‘그린 오션’도 ‘친환경’ 혹은 ‘녹색’으로 바꾸어 넣고, ‘오션’을 ‘시장’ 혹은 ‘산업’으로 대체해 조합한 새말을 후보로 올렸고, 그 중 설문조사 결과 88.1%의 높은 선호도를 보인 ‘친환경 시장’이 새말로 결정되었다(‘녹색 산업’이 76%, ‘녹색 시장’은 67%). 한편 씁쓸한 사실은 영어권에서도 쓰지 않는 ‘국산 영어’, 불필요한 영어 신조어를 국민들에게 ‘적극 소개하고 홍보하는’ 데 정부 관련 기관들이 여전히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부 지정 국가환경교육센터 누리집은 ‘새 환경용어’라며 “최근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식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개념, 그린 오션이 등장했다”고 홍보하는가 하면, 초중등 학생을 대상으로 ‘그린 환경일기’를 공모하기도 했다.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누리집에서 역시 “그린워싱(Green washing)을 경계하고, 리얼그린(Real Green)을 실천해야 해요”라는 글과 함께 ‘리유저블컵’, ‘리필스테이션’ 같은 영어가 등장하고 있다. 환경만 사랑해서 쓰겠는가. 우리말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검색을 계속하던 중 앞에서 말한 환경교육센터 누리집에서 ‘초록작당소’라는 단어와 마주쳤다. 정부가 환경 교육을 진행하고자 하는 시민 학생들에게 무료로 제공해주는 장비와 공간에 붙은 이름이었다. 이 얼마나 깜찍하고 발랄한가. 앞으로 ‘그린 어쩌고 센터’ ‘에코 어쩌고 플레이스’ 대신 이런 이름을 보다 자주 접할 수 있길 바라본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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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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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슬 컬처, 그 용어의 모호함 장민지(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조교수) 캔슬이라는 용어는 사전적으로 ‘취소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내가 무언가를 실행하고자 계획했던 것을 없던 일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약속이나 예약을 취소할 때, 우리는 외국어인 ‘캔슬(취소하다)’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캔슬 컬처라는 용어가 수사하고 있는 사회현상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기는 어렵다. 현재 국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캔슬 컬처라는 용어에서의 ‘캔슬(cancel), 캔슬링(canceling)’이라는 영단어의 의미는 ‘공인들의 행동이나 의견에 관해 반대하거나,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이러한 반대 의사를 표면화’하고, 그들의 지지를 가시적으로 철회, 즉 취소하는 온라인 문화 현상을 뜻하고 있다(서경주, 2020). 캔슬 컬처는 인종, 종교 혹은 성 소수자들을 차별, 혐오하는 발언을 한 공인들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 해시태그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이를 가시화하는 운동에서 시작된 역사를 갖는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문화적 현상을 온라인상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다. 단적으로 아이돌 멤버들의 학교폭력 사태가 온라인에서 다양한 증거를 통해 드러나자 그들의 지지를 철회하겠다(보이콧)는 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획사들은 일제히 입장문과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광고주들은 재빠르게 그들을 광고계에서 삭제하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에스비에스(SBS)의 과도한 역사 왜곡에 대한 수용자들의 강력한 비판과 이로 인한 <조선구마사> 드라마의 편성 취소는 바로 캔슬 컬처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수용자들의 강력한 저항과 판결이 대중적인 낙인 효과를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한 대중적 인식의 변화가 실질적인 행동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캔슬 컬처라는 외국어의 사용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실질적인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한다. 심지어 어려움을 ‘더욱’ 겪게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가 캔슬이라는 외국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캔슬 컬처라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특히 ‘반대 의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의 ‘캔슬’이라는 방식이 이 용어를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캔슬은 ‘하지 않음’을 뜻하지만, 캔슬 컬처에서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 또한 적극적인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캔슬 컬처’라는 용어보다 ‘등돌림 문화’와 같은 한국어 사용이 훨씬 더 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직관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배달의 민족>에 입점한 식당들이 소비자들의 평점과 리뷰를 왜 관리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배달의 민족을 이용하는 구매자들은 이제 더 이상 음식을 소비하는 위치만을 점유하진 않는다. 식당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리뷰와 높은 별점을 얻기 위해 이용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이용자들은 리뷰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그리고 그 의견들은 웹 상으로 축적되어 다방면으로 노출된다. 배달의 민족이라는 어플리케이션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화제가 된 현상들이 또 다른 사이트로 옮겨가며 계속 공유되고, 확산된다. 이것이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해온 ‘등돌림 문화’의 일부다. 이러한 문화 현상은 캔슬 컬처라는 용어보다 ‘등돌림 문화’라는 한국어를 통해 설명되기 용이한 지점이 있다. 예를 들어 2009년 박재범이 마이스페이스(myspace)*에 올린 글 때문에 빚어진 2PM 탈퇴사건은 단순한 소비자로 위치되었던 팬덤이 이에 반박하며 그가 속해 있었던 2PM의 모든 활동을 불매하고 배척(보이콧)하겠다는 대규모 시위로 확장되면서 주목받았다. 이 또한 팬들이 대대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기획사로부터 등을 돌린 사건이다. ‘등돌림 문화’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단순히 수용자가 수용에 대해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대적으로 ‘거부하겠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히며 대규모의 집단 행위를 동반한다는 문화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용이하다. 특히 이러한 문화는 단순히 이전까지의 소극적인 수용거부와는 다른 행태를 보인다. 이 때문에 이전까지 생산-수용 위계에서 하부에 위치하던 수용자의 권력이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 힘을 바탕으로 이러한 위계를 전복시킬 수 있는 잠재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는 면에서 이 용어의 한국적 사용이 빛을 발한다고 볼 수 있다. *마이스페이스: 우리나라의 네이버 블로그, 싸이월드와 유사한 온라인 가상공간. 현재는 없어졌다. 서경주(2020). 캔슬컬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언론중재>.156. Jenkins, H., Ford, S., & Green, J. (2013). Spreadable media. New York University Press. Tom Cowie(2019.12.2.) . The Sydney Morning Herald. https://www.smh.com.au/culture/books/cancel-culture-is-the-macquarie-dictionary-s-word-of-the-year-for-2019-20191202-p53fzy.html 장민지 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조교수 저서: <섹슈얼리티와 퀴어>, <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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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장민지
- 등록일 : 20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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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economy, “정치경제학”인가 “경제학”인가 - 통역과 번역 사이에서 강신준(동아대학교 경제학과 특임교수, 맑스엥겔스 연구소장) 1987년, 마르크스(1818-1883)의 <자본> 제1권(이론과 실천) 출판에 관여한 이후 평생을 마르크스 문헌 번역과 함께하면서 특별히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던 번역어가 하나 있다. <자본>의 부제목으로 달린 Politische Ökonomie(poltical economy)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개 “정치경제학”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용어는 원래 애덤 스미스(1723-1790)가 자신의 <국부론> 제4편에서 “국민과 국가를 모두 부유하게 만들고자 하는 학문”의 이름으로 처음 사용하였고 이후 그가 지칭한 이 분야의 모든 학자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이 용어를 완전히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이미 전래되어 오던 이코노미(economy)라는 용어에 폴리티컬(political)을 결합시켜 이 용어를 만들어내었다. 이코노미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고대 그리스의 경제 단위였던 가족농장(노예농장)을 관리한다는 의미(즉 경제)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기는 고대 그리스 이후 계속 이어져 오던 가족농장 중심의 경제가 국가라는 훨씬 큰 경제 단위로 새롭게 묶인 절대주의 시대였다. 이제 가족농장의 명운은 국가 경제의 부흥에 달려 있었다. 국가를 단위로 하는 새로운 경제를 다루는 학문이 필요하였고 애덤 스미스는 그 학문을 지칭하는 용어로 political economy를 만들어낸 것이다. 즉 이 용어는 경제라는 의미의 economy에 국가를 단위로 한다는 의미로 political을 새롭게 결합한 것이다. 여기에 “정치”라는 개념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다. 따라서 political economy를 “정치경제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그 맥락이나 내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버리는 일이다. 굳이 번역한다면 “국가경제학”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조금 더 본래의 뜻에 가까울 수 있다. 그림1. 애덤 스미스가 만들어낸 경제학 최초의 명칭 political economy를 처음으로 사용한 데이비드 리카도의 저작(1817년) 그런데 이런 혼란에 또 하나의 어려움이 중첩되어 있다. 바로 economics라는 용어이다. 국내에서 “경제학”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용어는 원래 1890년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이 자신의 저작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그는 애덤 스미스 이후 기존의 학문 체계 가운데 일부(가치론이라고 부르는 부분이다)를 수정하고 그것을 기존의 political economy와 구별하기 위해 economics라는 호칭을 새롭게 끌어다 사용하였다. 즉 economics는 political economy에서 파생되어 나온 하나의 이론에 대해 붙여진 명칭에 불과한 것이다. 그림2. economics를 처음으로 사용한 앨프리드 마셜의 저작(1890년)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를 각기 구별하여 “정치경제학”, “경제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 두 용어는 모두 경제를 다루는 동일한 학문을 가리키고, 그 학문의 명칭은 내내 political economy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0년 마셜이 혼자 예외적으로 economics를 주장했을 뿐이다. 마셜이 수정한 이론에 동의한 학자들은 통칭 신고전파로 불리는데 이들 가운데 제본스, 멩거, 발라 등의 다른 학자들은 아무도 economic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모두 political economy를 그대로 사용했다. 애덤 스미스가 처음 정의했듯이 “국민과 국가를 모두 부유하게 만들고자 하는 학문”을 무엇으로 부를 것인지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를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된다. 프랑스와 독일에는 economics라는 용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이 학문을 économie politique로, 독일에서는 Volkswirtschaftswissenschaft, 혹은 Politische Ökonomie로만 부른다. 만일 economics만을 “경제학”으로 번역하고 다른 용어는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이들 두 나라에는 “경제학”으로 번역될 학문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정의한 학문을 이미 “경제학”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를 흔히 경제학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하지만 economics는 1890년에야 비로소 처음 나타난 용어이고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기에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economics만을 경제학으로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요컨대 경제학은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져 세계 각국으로 보급된 학문으로, 그 명칭은 시기별로, 그리고 각 나라별로 제각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들 다양한 명칭은 모두 동일한 학문을 가리키는 것인 만큼 하나의 용어, 즉 “경제학”으로 통일해서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이 문제는 동양에서 가장 먼저 마르크스를 번역했던 일본에서 이미 겪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도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고민이 있었고 학자들마다 제각기 “정치경제학”이나 “경제학”으로 번역하면서 혼선을 빚다가 1998년 나고야 대학의 다케모토 히로시 교수가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적어도 일본의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political economy를 모두 “경제학”으로 통일해서 부르고 있다. 그래서 <자본>의 부제목도 “경제학 비판”으로 붙여져 있다. 그림3. 일본에서 출판된 <자본론> 번역본, 부제목으로 “경제학 비판”이 붙어 있다. 이 문제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통역과 번역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political economy를 “정치경제학”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모두 “political”이라는 말의 형태에 집착한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단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외국어를 “형태” 그대로 옮기는 것, 대개 직역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통역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번역은 통역과 달리 외국어에 담긴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political economy의 번역은 바로 통역과 번역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연하자면 독일에서 이 학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Volkswirtschaftswissenschaft도 “국민경제학”이 아니라 그냥 “경제학”으로 번역해야 맞다. 이 용어 역시 경제학의 다양한 명칭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강신준(교수, 연구소장)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특임교수, 맑스엥겔스 연구소장 저서: <자본의 이해>, <오늘 자본을 읽다>,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역서: <자본>1~3(카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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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강신준
- 등록일 :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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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어 못지 않은 구조적 언어 차별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얼마 전 장애인 권리 예산의 확보를 요구하는 자리에서 지지발언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말이 꼬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같은 인간입니다.”라고 해야 할 걸 “장애인과 비정상인 모두 같은 인간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비장애인’이라고 해야할 걸 ‘비정상인’이라고 했으니, 시각장애인인 나조차 아직도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낱말짝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보다. 그럼에도 이제 제법 많은 사람에게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낱말짝이 자리를 잡아간다. 장애인 외에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비장애인으로 일컫자는 의견이다. 그전에는 ‘장애인-정상인’이라는 낱말짝이 자주 쓰였는데, 그런 구도라면 장애인은 ‘비정상인’이냐는 문제 제기가 많았다. 세상을 장애가 없는 사람의 기준에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태도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니,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차별’이라는 주제가 사람들에게 민감하게 다가가나 보다. 언어적 차별은 차별어를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다. ‘장애인-정상인’과 같은 낱말짝이나 서울 중심의 ‘상행선-하행선’ 같은 낱말짝 형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남자 교수에게는 ‘남교수’라고 안 하지만 ‘교수-여교수’처럼 사회적 약자인 특정 집단을 특이 현상인 양 부르므로써 보편적이지 않고 주류가 아니라는 인상을 풍기게 하는 형식도 있다. 물론 ‘맘충, 한남충, 김치녀’처럼 혐오의 의도를 가지고 만든 혐오표현이 가장 노골적인 차별어이며, 차별의 전통을 담고 있는 ‘암탉이 울면.... 어디서 여자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등의 말도 혐오가 밴 차별어의 한 가지 형식이다. 노골적인 차별어 어휘에 대해서는 선악 판단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구조적으로, 역사적으로 벌어진 차별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차별어를 차별어로 인정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예를 들어 ‘유모차’와 같은 용어가 아이 키우는 일은 여성의 고정적인 성 역할이라는 말빛을 풍기므로 이를 ‘유아차, 아기차’로 바꾸자고 할 때 어느 특정 역사 시기에 여성이 육아를 주로 담당했던 사실을 변치 않는 자연 섭리처럼 받아들였던 사람에게는 거부감이 이는 것이다. 따라서 차별어에 대해 고민할 때는 생각을 매우 개방적으로, 탄력적으로 열어놓아야 한다. 세상 변화를 통해서 깨달을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공부를 해야할 수도 있다. 다만, 두 가지 경우에 자주 논란이 일어난다. 이게 차별이냐 아니냐 갑론을박을 해대는데, 하나는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을 이름에 붙이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비유적 표현으로 장애나 여성을 거론할 경우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 언제든 ‘여,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반드시 차별적이냐는 질문이 있다. “여교수들은 이래서 문제다, 여직원들은 이래서 한계가 있다”라고 집단화하여 여성 구성원을 차별하는 언사는 당연히 차별 행위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일부러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어 조직 이름을 붙이는 경우에,그것이 스스로 차별의 올가미를 거는 일이라고 볼 까닭은 없다. ‘여성노동자회, 여의사회, 남자간호사회’ 등의 사회적 약자 모임에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스스로 차별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집단화, 힘 모으기 장치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둘째, 비유적 표현으로 ‘치마바람, 처녀작’ 또는 ‘외눈박이’처럼 여성과 장애를 들먹이는 경우에 이게 언어적 차별이냐는 논란이다. 내가 보기엔, 말한 이에게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 말을 접한 여성이나 장애인에게는 그것이 차별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따지고 보면, 외눈박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등의 말은 혐오의 의도를 가지고 만든 말이 아니다. 단지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고 부르기 위해 지은 이름인데, 그 존재들을 차별했기 때문에 그 이름들도 차별의 용례로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말 안에 차별의 말빛이 깊이 아로새겨져 그 말을 듣는 당사자들이 차별의 느낌을 받게 된다. 대체로 인용과 경구에서 많이 쓰이는 이런 말은 요즘의 말로 바꾸어야 한다. 굳이 차별 시비를 일으키면서 이런 말을 사용해야 할 까닭이 없다. “세상을 한 눈으로 보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세상의 다양한 면을 모두 봐라, 편견을 가지고 한쪽만 보지는 말라.” 뭐, 이렇게 말하자는 것이다. 차별어가 나쁘다는 사실은 굳이 근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차별의 부당함을 알아채는 순간 싹트게 된다. 남녀 차별, 장애 차별, 지역 차별, 인종과 민족 차별, 외모 차별 등은 비교적 차별의 부당성이 명백하므로 차별어의 사용에는 나쁜 짓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얼마 전까지는 지위와 재산에 따른 차별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비쳐졌고, 학벌과 학력의 차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매우 걱정스럽게도, 이런 시각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능력과 노력을 기준으로 차등적으로 대우하고 보상하는 것은 죄악시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다 보니 성공한 이와 실패한 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 출신을 차별하는 것이 무슨 문제겠냐는 일종의 뻔뻔함이 바짝 고개를 뜬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과를 차등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능력주의 신념은 특권이나 편법을 배격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신념이 도가 지나치면 성공과 성과에 배어 있는 다양한 행운과 보이지 않는 타인의 수고를 모두 무시하고 자신의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고만 생각하게 하여 ‘능력자’들을 오만하게 만들고 ‘무능력자’들을 저주받은 존재로 낙인찍는다. 여기서 언어, 특히 외국어가 구조적 차별의 장치로 작동한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채용 때 영어 능력을 보는 것이 그 사람의 전반적인 능력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영어 성적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확인해준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영어 능력은 선발의 기준이자 사회적 자격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여 배운 티를 내는 것,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능력자들이 겉으로 학벌과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 낮은 학력, 안 좋은 학벌은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외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저 그들 스스로의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 마구 쓰는 걸 전혀 이상해 하지 않고, 영어 모르는 사람들이 불평을 하기도 어려운 구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공동체 성원을 배려하면서 불평등을 줄이려는 언어 문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넘기 어려운 구조적 차별인 셈이다. 차별어 어휘 사용이 선과 악을 가를 수 있는 분명함을 가지고 있다면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영어 남용과 여기에서 비롯한 언어적 차별은 선과 악으로 가르기가 쉽지 않다. 어느 지점까지는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공동 선’의 관점에서 영어 남용을 줄이자고 말할 수 있을까? 우선 공공영역과 개인영역을 나눌 필요가 있겠다. 우리네 공용어가 한국어인 이상 적어도 공공영역에서는 우리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말로 표현하자는 합의가 가능하다. 그것이 외국어 능력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할 위험을 줄이고 정보 접근의 불평등 구조를 풀어가는 첫걸음이니까. 개인 영역에서도 그저 개인의 취향에 맡길 일만은 아니리라. 개인의 전문 영역에서 우리말 위주로 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지식 대중화의 발판이 된다. 개인이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 위주로 대화하려는 노력 또한 한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성원으로서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북돋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어떤 가치를 선택하는가, 언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려 하는가는 개인의 자유이긴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언어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묶어주는 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 안에 평등과 차별의 구조가 반영되고, 현실에서는 언어가 능동적으로 그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 이 글은 한국어문기자협회 <말과 글> 제174호에도 실렸습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작가 서울시와 경기도 국어바르게쓰기위원 국토교통부 철도역명심의위원 역임 저서에 [언어는 인권이다], [한자 신기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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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자 : 이건범
- 등록일 :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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