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말] 52. 스몰 럭셔리, 이제는 '소소한 사치'로
- 등록일: 20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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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우리 새말] 스몰 럭셔리, 이제는 '소소한 사치'로
김정희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
경제학 용어 ‘립스틱 효과’라는 말이 있다. 경기 불황에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고급품으로, 립스틱의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서두부터 ‘립스틱’이라는 외국어를 쓰는 게 머쓱하지만, 국립국어원이 일본어 ‘구치베니’를 순화한 우리말로 입술연지/연지와 더불어 립스틱/루주를 선정한 바 있다)
이번에 살펴볼 ‘스몰 럭셔리(small luxury)’가 바로 이런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식료품, 화장품, 생활용품과 같이 비교적 작고 소소한 제품을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것으로 구매한다”라는 뜻이다. 높은 물가와 수입 감소 등으로 지갑을 쉬 열지 않는 소비자가 값비싼 자동차나 명품 가방 대신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가 높은’ 물건을 구매하며 작은 사치를 누리는 행위다. 일종의 보상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서 가끔 ‘작지만 고급스럽고 개성 있는 호텔’을 일컬을 때 썼던 이 말을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때였다. 그해 10월 8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금융위기로 미국 소비자들의 구매패턴이 가격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라며, “1달러 안팎인 사탕이나 립스틱과 같은 필 굿 팩터(Feel good factor)가 있는 스몰 럭셔리 제품의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라는 분석자료를 배포했다. 이를 여러 언론사가 기사화하면서 ‘스몰 럭셔리’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이 용어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쓰였다. 3,000원짜리 봉지라면, 10만 원이 넘는 빙수, 25만 원짜리 케이크 등 식음료 업계가 ‘스몰 럭셔리’를 내세워 고가의 상품을 판매하는가 하면, 이른바 ‘1인 세신 샵(개인 맞춤형 때밀이)’도 스몰 럭셔리라는 수식어를 붙여 광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스몰 럭셔리’라는 용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이를 대체한 우리말 표현도 적잖이 쓰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작은 사치’와 ‘소소한 사치’다. 새말 모임에서는 ‘사치’를 대신할 만한 단어로 ‘호사’도 제시했다. ‘사치’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여론조사에 부쳐보니 사용자들은 ‘호사’보다 ‘사치’를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마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고, 단어 앞에 ‘소소한’, ‘작은’이라는 표현이 붙어서 부정적인 느낌을 상쇄했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그리하여 ‘스몰 럭셔리’의 최종 우리말은 ‘소소한 사치’가 선정되었다.
한편, ‘스몰’이라는 표현이 우리 언어문화에 빠른 속도로 침범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우려스럽다.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게 ‘스몰 웨딩’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적은 비용으로 소규모 결혼식을 올려 일반인들에게 귀감이 된 것은 좋은 일이나, ‘스몰 웨딩’이라는 말까지 함께 유행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
‘스몰 토크’, ‘스몰 비즈니스’, ‘스몰 라이선스’ 등 충분히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는 표현도 고스란히 영어로 쓰이고 있다. 이미 국립국어원에서 ‘스몰 웨딩’은 ‘작은 결혼식’으로, ‘스몰 라이선스’는 ‘소규모 인허가’로 순화해 발표했다. 이는 같은 ‘스몰’도 어감에 따라 때로는 ‘소소한’으로, 때로는 ‘작은’이나 ‘소규모’로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스몰 토크’나 ‘스몰 비즈니스’는 공식적으로 발표한 우리 말이 아직 없지만, ‘잡담’, ‘소규모 사업’ 등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러한 사례보다 더욱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스몰 토론회’나 ‘스몰 플렉스’ 같은 말이 언론에 불쑥 등장할 때다. 전자가 우리말 앞에 영어를 갖다 붙인 국적 불명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스몰’과 정 반대 뜻인 ‘플렉스(과시적 소비)’를 결합하였으니 가히 ‘어불성설’이다. 사실 ‘우리말 순화’조차 필요하지 않다. 아예 처음부터 쓰지 말아야 할 표현들이다.
※ 새말 모임은 어려운 외래 '다듬을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새말'로 다듬어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언론, 문학, 정보통신, 환경 등 여러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정희
- 한글문화연대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