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우리말 쓰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우영우 하자!
- 등록일: 2025.02.14
- 조회수: 281
쉬운 우리말 쓰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우리말을 영어보다 우선하자(우영우 하자!)
인천예일고등학교 교장, 박말선

해가 갈수록 거리에는 외국어 간판은 늘어가고 있다. 강남이나 홍대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외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영어 간판이 즐비하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영어 간판이 한두 개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백화점 안의 대부분의 상점이 영어 간판으로 바뀌었고, 거리의 가게들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영어나 이태리어, 불어, 일본어 등의 간판을 내걸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이 영어 간판이다.
나는 우리말 없이 영어만으로 표시한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며 일부러 백화점 여종업원에게 이 간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같이 다니던 우리 딸은 기겁을 할 듯이 엄마는 왜 그러느냐고, 창피하다고, 그리고 그 종업원이 그 영어를 썼냐고 나를 나무랐다. 영어 간판에 대해 따지려면 사장에게 따져야지 종업원이 무슨 죄냐는 뜻이다. 내가 사장을 만날 수 없으니 가게에 있는 아가씨에게 얘기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나처럼 여러 사람이 영어 간판이 불편하다고 말한다면 사장에게 전해 주겠지라며 나도 지지 않는다. 계속 그러면 앞으로 엄마랑 쇼핑 다니지 않을 거라고 딸이 쐐기를 박는다.
그렇게 딸과의 입씨름은 일단락되고 애들과 외출할 때에는 기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외국어 간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집에 와서 왜 영어만으로 되어있는 간판을 쓰면 안 되는지 얘기를 했다.
우선, 간판, 상호명, 상품명, 거리 표지판 등을 영어만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우리나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환갑이 지난 나는 다행히 전공이 영어여서 영어 간판을 읽을 수 있다. 내 나이대의 어른들은 여전히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시골 노인들이 서울에 왔을 때 느낄 당황함과 낯섦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복잡한 거리, 빵빵거리며 질주하는 수많은 차량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마천루, 처음 타보는 전철, 우리말 간판과 표지판으로 되어 있어도 목적지를 쉽게 찾아가기 힘든 상황이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외국어만 즐비하니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푸대접을 받는 상황이다.
시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아파트 이름을 영어로 지었더니 영어를 아는 시누이까지 데리고 와서 더 괴로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 않은가.
또 다른 우스갯소리를 들어보시라. 시골 할머니가 서울역에서 화장실이 급해서 서둘러 들어간 곳이 남자 화장실이었다. 당황하여 다급하게 나와서 맞은편 여자 화장실에서 볼일을 겨우 보았다. 집에 가서 손녀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손녀가 알려주기를 ‘할머니, 다음부터는 길게 써놓은 곳으로 가세요’라고 했다. Man보다 Woman이 글자가 더 길기 때문에 긴 쪽으로 가라고 일러준 것이다. 다음에 그 할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남자 화장실로 가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Lady, Gentleman이라고 쓰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영어로만 간판을 쓴다면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므로 이는 반드시 고쳐져야 할 일이다.
영어로만 간판을 쓰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자존심의 문제이다. 한번은 영어원어민이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너희 한국 사람들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세종대왕이라면서 왜 온통 영어만 쓰냐고. 순간 무척 당황스러웠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다가 외국인을 배려하는 차원이기도 하고 영어를 더 적극적으로 배워보려고 하다 보니 그렇다고 얼버무렸지만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영어 교사인 나는 영어가 강조되던 이명박 정부 시절,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름방학 동안 3주간의 숙박 영어 캠프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학생들은 모두 영어 이름을 지어 사용했다. 영어식 사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영어 캠프였으니 그때로서는 너무나 당연했었다. 그런데 캠프가 끝나고 바깥에서 학생들을 만났는데 그 애들의 한국 이름을 하나도 모르는 게 아닌가. 또 당황스러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에 가면 1~2년 살다 오더라도 이름을 영어로 바꾼다. 아니 심지어는 한국에 있어도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사는 미국 사람들도 그런가? 한국에 사는 동남아 사람들, 아랍권 사람들이 다 한국 이름으로 바꾸는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 조상님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가. 물론 창씨개명과 지금의 영어 이름 사용과는 결이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런 한글을 두고 영어로만 간판을 내거는 것은 재고해봐야 할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BTS를 비롯한 K-팝 가수들의 활약과 기생충, 미나리와 같은 영화계의 쾌거, 우리의 경제적 발전 등을 생각해보면 더 이상 미국을 무작정 동경하고 따르던 시절은 지났다고 생각한다. K-푸드, K-팝 등 우리의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가는 지금,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영어만을 사용하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이다. 한강 작가가 우리글로 노벨상을 받은 지금, K-랭귀지인 한글을 우선 써야 하지 않을까? 영어를 쓰면 뭔가 유식해 보이고, 시쳇말로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리 잡은 언어 사대는 아닐까.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고 나를 국수주의자로 오해는 마시라. 글로벌 시대에 어찌 영어를 쓰지 않고 살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유창한 영어로 강의도 하고 토론도 하고, 외국인과 대화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 평소 일상생활에서는 무분별한 영어 사용을 지양하고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해주자는 것이 나의 요지이다.
한때 나도 외국어를 우리말로 다 바꾸어 쓰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기에 우리 사회가 너무 많이 나아갔다. 그러니 한발 물러나서 영어로만 표기하지 말고 우리말과 함께 쓰자는 것이다. 우리말과 함께 쓸 때에는 우리말을 영어보다 우선적으로 쓰자(한영 병기, 우영우)는 뜻이다. 우리말이 있으면 우리말을 쓰고, 미처 우리말로 바꾸지 못해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발음 나는 대로 우리말로 적어주고 그 뒤에 영어를 쓰자는 뜻이다. 즉, 우리말 먼저 영어는 뒤에, 우리말 크게 영어는 작게, 우리말은 왼쪽에 영어는 오른쪽에 쓰자는 말이다. 우리말을 영어보다 우선하자(우영우하자)는 말이다.

박말선
- 인천예일고등학교 교장